노벨상 수상시인 루이즈 글릭, 마지막 시집 출간
“부엌에선 판매용 샌드위치를 포장하고 있었다./ 내 친구가 이 일을 했다./ 헐리 송글리, 우리 선생님은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보살피는 사람,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문 안쪽에,/ 카드 위에 한자로 일의 순서가 씌어져 있었다/ 번역하자면, 같은 순서로 같은 일을 할 것,/ 그리고 그 아래엔: 그것들의 기원을 우리는 지워 버렸다./ 이제 그들에겐 우리가 필요하다.”
12월의 가장 어두운 날을 그린 루이즈 글릭의 시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의 일부다. 지난 10월 별세한 2020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루이즈 글릭의 시집 <내려오는 모습> <아킬레우스의 승리>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 등 6권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시공사는 지난해 11월부터 <야생 붓꽃> <아베르노>를 시작으로 <목초지> <새로운 생> 등까지 포함해 최근작까지 총 13권 전권을 완역 출간했다.
글릭은 한국에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알려졌지만 이미 미국 현대 문단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1980년 미국에서 내놓은 세 번째 시집 <내려오는 모습>은 그해 출간된 시집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네 번째 시집 <아킬레우스의 승리>(1985)는 시골집이 화재로 소실되는 사건을 겪고 난 뒤의 상실과 아픈 아버지를 바라보는 슬픔이 배어 있다.
시 ‘앉아있는 모습’은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가 걷길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그렸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걷기를 바랐어요./ 여름 저녁에 팔짱을 끼고,/ 우리가 연인처럼 걷기를 바랐어요,/ 그리고 그런 상상을 너무너무 믿었기에/ 나는 말해야 했어요, 당신이 일어서도록 재촉해야 했지요./ 당신은 왜 내가 말을 하도록 했나요?/ 당신 얼굴에 어린 고뇌를 받아들이듯 나는 당신 침묵을/ 움직이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받아들였지요-/ 내가 손을 내밀고 영원히 서 있는 것 같았어요.”
번역을 맡은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는 “앉아있는 아버지의 침묵을 ‘움직이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는 시의 목소리에 전이됐다”고 말하며 “시인이 먼저 밟은 그 길은 우리 모두가 걷는 길”이라고 말했다.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은 글릭의 마지막 시집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첫 시집이기도 하다. 표제시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은 겨울마다 노인들이 숲으로 가는 이야기다. 노인들은 삭힌 이끼로 샌드위치를 만들고 예쁜 이끼로 분재를 만들며 추운 겨울을 이겨낸다. 시는 마지막에서 제목의 ‘협동’이라는 단어처럼 ‘우리’ ‘보살핌’이라는 화두를 꺼낸다. 스산한 겨울내를 풍기면서도 온기를 안은 시다. 정 교수는 “이 시집은 죽음에 대한 온갖 암시와 후회, 과거를 돌아보는 마음, 미래를 바라보는 마음이 우울하게 섞여 있다”면서도 “무서운 진실을 아무렇잖게 평온한 언어로 표정 없이 들려주는 시인”이라고 말했다.
시공사는 글릭이 한국 독자들에게 자신의 세계가 고스란히 잘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번역자를 출판사와 함께 선정하고, 시집의 한국어판 표지 색깔에 관한 의견을 보태기도 했다고 전했다. 번역을 담당한 정 교수와는 시어의 번역과 뉘앙스를 두고 치열한 질문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글릭은 마지막 시집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의 의견을 주고받은 지 사흘 뒤 사망했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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