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따뜻한 ‘뱅쇼’ 한 잔 어때요?…집에서 쉽게 만든다는데 [전형민의 와인프릭]
어린 시절, 1년에 딱 한 번 부모님보다 먼저 잠에서 깨는 날이 있었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설레는 마음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부터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녔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어딘가 숨겨뒀을 선물을 찾아야 했었거든요.
아무 이유 없이 설레는 시기, 연말연시를 알리는 크리스마스가 돌아왔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기 위한 종교기념일이었던 크리스마스는 이제 종교적 의미를 넘어 전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연말 휴일이 됐습니다.
대부분이 수백년간 기독교 국가였던 와인의 중심지, 유럽에서 크리스마스는 아주 중요한 명절입니다. 케이크를 구워 가족이 함께 나눴고, 저녁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와인을 마셨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유럽 대륙 각국의 와인 특성이 제각각이듯 크리스마스 저녁 이들이 마시던 와인도 상당히 다양했는데요. 오늘 와인프릭은 크리스마스에 즐겼던 각국의 와인들에 대해 알아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 지역의 레드 와인에 다양한 향신료와 베리류, 건포도, 약간의 설탕 등을 섞어 끓여서 만듭니다. 멀드 와인에서 멀드(Mulled)는 섞는다(Muddle)는 뜻의 단어에서 파생됐다는 게 오늘날 정설입니다. 전통적으로는 감기 등에 약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계피 같은 향신료도 들어가고요.
역사에서 멀드 와인은 무려 2세기 즈음부터 등장합니다. 로마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전후 겨울을 나기 위한 필수적인 음료로 사랑 받았죠.
고대 로마 시대 문헌에 따르면 와인에 벌꿀, 후추, 월계수잎, 사프란, 호두, 대추야자 등을 넣어 만들었다고 합니다. 향신료와 당분은 멀드 와인이 산화되지 않고 만든 후에도 오래 보관할 수 있었던 보존제의 역할도 했습니다.
중세에는 이포크라스(ypocras)라고 불렸는데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을 딴 히포크리스(hipocris)의 파생형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인 중세 시기 사람들 역시 멀드 와인이 건강에 좋다고 생각한 겁니다.
당시 와인은 유럽의 석회질이 잔뜩 포함된 물보다 훨씬 더 위생적이었고 멀드 와인은 가열까지 됐으니, 아마도 실제로 추운 겨울 동안 사람들의 건강을 유지해 주었을 겁니다.
만약 한번이라도 제대로된 뱅쇼 맛을 봤다면, 요즘처럼 영하의 기온이 계속되는 날 따뜻한 뱅쇼 한 잔 생각이 굴뚝같을 겁니다.
뱅쇼의 핵심은 껍질이 남아있는 통오렌지와 통계피입니다. 칼집을 낸 오렌지와 껍질에서 깊은 풍미가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계피가루 대신 통계피를 사용하는 것도 계피 가루 때문에 뱅쇼가 탁해지고 텁텁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필수입니다.
팔팔 끓이는 게 아니라 뭉근하게 가열한 후 끓기 직전 가열을 멈추고 뚜껑을 덮어 놓은 채 몇 시간 동안 맛이 푹 우러나게 두는 것도 비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뱅쇼의 베이스가 되는 와인을 고르는 일입니다. 평소 보르도 와인과 부르고뉴 와인 중 취향이 있다면 취향대로 고르는 게 좋습니다. 베이스 와인에 따라 뱅쇼의 맛과 향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별다른 취향이 없다면 적당한 가격의 보르도 블렌드 와인을 추천합니다. 알자스 같은 화이트와인 산지에서는 화이트와인으로 뱅쇼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에 마실만한 독일 와인하면 우리 머릿속에는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병에 담긴 독일 모젤 지방 리슬링이 더 먼저 떠오를 겁니다. 독특한 병 모양 때문에 덮어놓고 장삿속이라고 매도하기엔 제법 괜찮은 품질의 와인도 있으니 잘 골라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리슬링 품종은 산도와 당도, 향이 뛰어나 많은 매니아들이 즐기죠. 독일에서는 추위에 강한 특징 덕분에 일찍부터 많이 재배했는데, 이 때문에 독일 와인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특히 라인가우 지역과 모젤 지역은 독일의 양대 리슬링 재배지 입니다.
독일은 리슬링 품종으로 빚은 와인을 여러 등급으로 세분화해 관리합니다. 최상급인 프레디카츠바인(Pradikatswein)은 가당을 허용하지 않아 순수하게 포도에서 온 자연적인 당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라인가우나 모젤에서 생산된 리슬링 와인에 프레디카츠바인이 적혀있다면 한번쯤은 사서 먹어볼만 합니다.
이탈리아 만의 특색 있는 크리스마스 음료는 북서부의 끝 알프스의 산지에 위치한 발레 다오스타(Valle d’Aosta)주(州)에서 만드는 그롤라(Grolla) 입니다.
그롤라는 와인 찌꺼기를 증류해 만드는 그라빠(Grappa)라는 고도수(40도 이상) 알코올이 베이스인데요. 여기에 설탕과 오렌지 껍질, 계피스틱 등과 에스프레소 커피를 함께 넣어 뜨겁게 제공합니다.
기주(基酒·기본이 되는 술)가 고도수의 증류주다보니 불을 붙이면 파란 불꽃이 타오르는데, 전용 용기에 담아 불을 붙인채로 손님에게 서브하고 불이 꺼지면 손님들이 함께 마시는 식입니다.
이 외에도 프로세코(Prosecco)와 프란치아코르타(Franciacorta) 같은 전통 스파클링 와인도 크리스마스에 주로 음용됩니다.
전통적인 이탈리아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에는 키안티클라시코(Chianti Classico)나 바롤로(Barolo)와 같은 레드 와인이 등장하고, 디저트에는 빈 산토(Vin Santo) 같은 달콤한 와인이 포함됩니다.
글뢰그가 다른 유럽 국가 멀드 와인과 다른점도 명확한데요. 바로 증류주를 추가한다는 겁니다. 이는 글뢰그의 기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과거 스칸디나비아에서 집배원이 말이나 스키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할 때 추위를 이기기 위해 양념된 증류주를 들고다니며 마셨던 것에서 비롯됐습니다.
주로 추가하는 증류주는 당연하게도 보드카인데요. 고급 증류주인 위스키를 넣거나 위스키 맛과 풍미가 느껴질 수 있도록 견과류(!?)를 첨가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유럽에서 크리스마스에 멀드 와인만을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남부나 서부 유럽 같이 따뜻한 곳에서는 크리스마스더라도 일반 와인이나 쉐리(스페인), 포트와인(포르투갈) 같은 주정강화와인을 즐기기도 합니다.
이렇듯 유럽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풍부한 와인 문화와 깊이 얽혀 있고, 각 나라의 와인은 고유한 전통과 풍미를 자랑하는 셈입니다.
연구진은 그 이유에 대해 ‘어린 시절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과 ‘타인에게서 무언가 선물을 받고 싶다는 잠재의식’, ‘착한 일을 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등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순수하고 순진한 마음에 대한 그리움, 끌림인 셈 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대하는 마음처럼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까요. 내 돈을 주고 산 물건이 배송돼 오는 택배조차도 기대하며 즐거워하는데,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 선물 받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은 얼마나 설렐까요.
한 해를 정리하는 바쁜 시기지만, 잠시 짬을 내어 잊었던 주변을 돌아보고 챙기는 여유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산타클로스의 선물보다 더 큰 설렘과 기쁨을 주는 존재니까요.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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