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전쟁’의 명암… 내우외환 젤렌스키·종신집권 나선 푸틴 [세계는 지금]
성과 미미한 여름 대반격
2023년 ‘귀환의 해’ 삼아 공세 나선 우크라
이·팔 전쟁 등에 밀려 무관심 대상으로
美 등 서방 지원 줄어들면서 교착 빠져
전쟁 초기 빼앗긴 영토의 54%만 되찾아
장기전에 높아지는 피로감
러 함대 크름반도서 몰아낸 성과에도
젤렌스키 국내 지지율 하락세 돌아서
총사령관, 젤렌스키 비판 ‘불화설’ 증폭
푸틴은 정적들 사망·실종에 5선 도전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두 달 후면 2년을 맞는다. 전쟁은 22개월째 단 몇 시간의 휴전도 없이 이어져 왔다. 우크라이나군 사망자는 10만명을, 러시아는 20만명을 훌쩍 넘겼을 것으로 미국 정부는 추정한다.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망자도 1만명을 넘겼으며, 수치를 여전히 집계 중이라 유엔은 민간인 피해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
막대한 피해는 이제 놀라움의 대상이 아니다. 길어진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는 여론만 높아지고 있다. 지난 10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아예 우크라이나 전쟁이 피로를 넘어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중이다.
‘잊힌 전쟁’이 되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현재 전황을 조망해본다. 이 전쟁을 이끄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그의 적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에 생긴 균열과 변화도 함께 살펴본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31일 새해 전야 연설에서 “2023년을 귀환의 해로 삼자”며 “군인들은 가족에게, 수감자들은 집으로, 피란민들은 우크라이나로, 우리 모두 우리 땅으로 귀환하자”는 희망찬 꿈을 꿨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이번 연말을 고향에서 가족과 보내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일어나기 어렵게 됐다. 지난 6월 러시아에 빼앗긴 자국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목표로 시작한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작전이 현재까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다.
22일 미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반격 공세를 시작한 이후 탈환한 러시아 점령지 영토는 바흐무트, 도네츠크 등의 마을 10여곳에 그친다. 공세에 큰 진전이 없었던 탓에 우크라이나는 전쟁 초기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 중 약 54%만을 되찾은 상태다.
우크라이나의 진지전은 땅을 파서 만드는 참호 중심이다. 참호전이 이어지고 있는 최전선은 현재 그 어느 쪽도 전진하지 못하는 교착 상태다. 잘루즈니 총사령관은 “참호전은 전쟁을 수년 동안 이어지게 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약화시킬 것”이라며 “(참호전이 전개됐던) 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제국 4곳이 붕괴하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어느덧 두 번째 겨울이 시작돼 전선은 더욱 깊은 교착 상태로 빠져들 전망이다. 겨울은 참호를 참상 그 자체로 만든다. 빗물이 고인 참호에서 버티는 병사들의 발은 동상에 걸리기가 일쑤다. 겨울 동안 우크라이나 병사들은 러시아 군대보다도 이 혹독한 추위와 맞서 싸우는 게 먼저다.
전황이 우크라이나에 마냥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육지에서는 소모전이 이어졌지만, 바다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세계 해군력 3위에 달하는 러시아의 흑해함대를 푸틴 대통령이 성지로 여기는 크름반도에서 몰아낸 것이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도 지난 14일 공개된 미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 기고문에서 “우리는 흑해 전투에서 승리해 해상 수출의 흐름을 회복했다”고 자평했다. 러시아는 지난 7월 흑해 곡물 협정을 일방 파기한 후 우크라이나가 주로 곡물을 수출하는 흑해 항로 봉쇄 작전을 펼쳤는데, 우크라이나가 이에 대한 반격에 성공한 셈이다.
ISW가 지난 6월부터 이번 달까지 분석한 위성사진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흑해함대의 본거지인 크름반도 세바스토폴항에 정박 중이던 잠수함과 호위함, 초계함 등을 멀리 떨어진 흑해의 노보로시스크항으로 이동시켰다.
러시아는 또 세바스토폴항에서 후퇴하던 지난 10월 조지아 북서부에 있는 친러시아 자치공화국인 압하지야의 오참치라항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협정을 맺었다. 오참치라항에서는 현재 기지 건설을 위한 준설 작업이 진행 중이다. ISW는 러시아가 세바스토폴 대신 이곳을 흑해함대 기지로 삼으려는 계획이라고 분석했다.
영국산 미사일과 같은 서방의 무기 지원 덕에 우크라이나는 ‘사흘 안에 함락할 수 있다’던 푸틴 대통령의 공언이 무색하게 2년 가까이 러시아와 맞서고 있다. 서방의 전폭적인 지원 뒤에는 호소력 짙은 연설로 무장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광폭 외교가 있었다. 올해 젤렌스키는 미국만 두 번 찾았고, 영국과 독일·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은 물론 중동, 일본까지 방문했다.
어딜 가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쟁 피로감으로 그를 향한 국제사회의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미국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 젤렌스키의 첫 방미 당시 미국 의회는 상·하원 합동 연설 자리까지 마련하고 그의 연설에 수십 번의 기립박수를 보냈다.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안이 민주·공화 양당의 정쟁 대상이 되면서 상황은 뒤바뀌었다. 지난 11일 세 번째로 미국을 찾은 젤렌스키는 1년 전과 달리 미 의회 연설대에 오르지 못했다. 의회 수뇌부가 그의 공개 연설을 거부한 탓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보좌진은 대신 폭스뉴스, 오프라 윈프리 등과의 인터뷰를 주선했으나 이마저 거절당했다고 영국 타임스는 전했다.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도 그의 지위에 금이 가고 있다. 비탈리 클리치코 키이우 시장은 지난 3일 언론 인터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고립과 독재화로 지지를 잃고 있다”며 그가 결국 실각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클리치코 시장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오랜 정치 숙적이긴 하지만, 이러한 공개 비판은 실제로 현지에서도 젤렌스키를 향한 불만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영국 텔레그래프는 분석했다.
잘루즈니 총사령관은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음을 인정하며 서방의 지원을 통한 공군력 등의 보강이 아니면 “우리에게 깊고 아름다운 돌파구는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냈다. 이는 서방의 추가 지원을 끌어내지 못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능을 지적했다는 분석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직접 논평을 내고 교착상태가 아니라고 반박하며 총사령관의 발언은 “침략자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잘루즈니 총사령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18일 언론 인터뷰에서도 지난 8월 ‘부패와의 전쟁’ 일환으로 전국 병무청장을 전원 해임한 젤렌스키의 결정에 불만을 드러내 불화설이 더욱 커지고 있다.
서방의 단일대오 반러전선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던 푸틴 대통령은 지난 8일 내년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다. 푸틴이 5선에 성공해 2030년까지 임기를 늘리게 되면 30년간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을 제치고 러시아혁명 이후 최장기 지도자가 된다.
국제형사재판소(ICC) 체포영장 발부 후 옛 소련 국가와 중국 등만 찾으며 해외 순방을 자제해온 그는 이달 초 전쟁 이후 처음으로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았다.
이지안 기자 ea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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