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따라 바뀌는 회장님···'포스코 잔혹사' 이번엔 끝날까 [김기자의 헤비톡]
정권 교체기마다 어김없이 퇴임
최정우 회장 임기 D-3개월 남아
완주하면 55년 역사상 첫 기록
"민영화 23년···외풍 끊어내야"
D-90.
내년 3월 임기 만료를 앞둔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의 시계가 빠르게 흐르고 있다. 최근 포스코 차기 회장 선출을 위한 'CEO 후보추천위원회'가 가동되면서 그의 거취표명에 온 관심이 쏠렸지만 그의 연임 여부만큼 주목받는 게 있다. 바로 임기 완주다.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은 물론 2000년 완전 민영화 이후에도 포스코 회장들은 차기 정권이 들어선 후 하나같이 불명예 퇴진을 했다. 인사에 정권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이른바 '포스코 회장 잔혹사'다.
역대 포스코 회장 8명은 새 정권이 들어선 후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최 회장의 전임이었던 권오준 전 회장도 외풍을 견뎌내고 연임에 성공했지만 결국 얼마가지 않아 퇴진한 전례가 있다.
◇정권이 바뀌면 회장님도 바뀐다=정권의 외압은 대부분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외압설이 정설로 굳어진 이유는 역대 회장들이 물러나는 모양새가 모두 정권 교체기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전임 회장들은 새 정권이 들어선 후 각종 비리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며 물러났다.
특히 2017년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인물인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수첩을 통해 드러난 청와대의 포스코 인사 개입 정황은 잔혹사의 배경이 외압이라는 확신을 더욱 키웠다. 당시 그의 수첩에는 포스코 주요 임원들의 명단이 빼곡히 담겨있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포스코 임원 인사에 광범위하게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포스코 회장 잔혹사는 초대 회장인 고(故) 박태준 회장이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종합제철 대표이사 회장에서 물러난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4년 간 지킨 회장직에서 내려온 박 전 회장은 당시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 대통령선거 공약화를 요구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회장의 뒤를 이은 황경로 회장도 김영삼 정부 출범과 동시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황 전 회장은 거래업체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92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1심서 징역 3년, 입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3대 회장인 정명식 회장도 1년 만에 사임했다.
4대 회장인 김만제 회장은 김영삼 정부 말기까지 4년 간 포스코 회장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사임했으며, 이후 1999년 2월 포스코 회장 재임기간 동안 회사 기밀비 4억 2415만 원을 유용한 업무상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민영화 이후에도 외압은 계속돼=포스코는 2000년 9월 정부 지분 전략 매각으로 완전 민영기업으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정권교체기에 연동된 회장 잔혹사는 계속됐다.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취임한 5대 유상부 회장은 2003년 3월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가 유 전 회장의 발목을 잡았다.
그 뒤를 이어받은 6대 이구택 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인 2008년 검찰이 정기세무조사 무마 청탁설 조사에 나서자 2009년 1월 돌연 사퇴했다. 7대 정준양 회장은 박근혜정부 출범 1년 뒤인 2014년 3월 사퇴했고, 이듬해인 2015년 11월 배임·횡령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됐으나 무혐의로 마무리 됐다.
8대 권오준 회장도 마찬가지의 전철을 밟았다. 2014년부터 시작해 연임까지 성공했지만 2013년 회장 선출 과정에서 최순실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 등올 인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잔혹사의 서막...해외 순방 제외=포스코 회장직에서 물러나기 전 전임들은 대부분 대통령 주요 행사에서 배제되는 이른바 '포스코 패싱' 현상을 겪으며 퇴진 압박설에 시달렸다. 권 전 회장도 최순실 게이트 연루설에도 당당히 연임에 성공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마자 다시 교체설에 시달린 이유가 바로 패싱이었다. 권 전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해외 순방길에 단 한 차례도 동행하지 못했다.
최정우 회장 역시 이 때문에 퇴진 압박에 시달렸다. 포스코그룹은 시가총액 기준 6위에서 지난해 5위로 한 계단 올라섰지만,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단 한번도 대통령 해외 순방길에 동행하지 못했다. 권 전 회장이 문 정부 시절 경제사절단에 모두 배제된 케이스와 동일하다. 임기를 앞두고 확대 진행된 세무조사도 전임 회장이 겪었던 수순이다.
◇주인 없는 기업, 최대 약점으로=잔혹사가 끊이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포스코가 주인 없는 기업이라는 점이 꼽힌다. 포스코의 최대주주는 6.7%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국민연금공단이며, 나머지는 외국계와 소액주주가 차지하고 있다.
강력한 오너십이 없는 만큼 재벌기업들이 겪는 시끄러운 문제에선 벗어나 있지만, 그만큼 정권의 외압을 견디기 힘든 구조인 셈이다. 오너 리스크의 자리에 관치 리스크가 들어온 것이다. 포스코뿐만 아니라 KT, 한국항공우주 등 포스코처럼 주인 없는 회사들은 예외 없이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전문가들은 관치 리스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권 스스로 민영기업 포스코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포스코를 여전히 국영기업으로 여기고 쉽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각종 비리 의혹 수사 역시 포스코에 대한 정부 영향력을 유지하는 무기였다.
◇지배구조 선진화...포스코 악습 끝낸다=포스코는 최근 회장 선임 절차를 바꾸고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면서 외풍 차단을 위한 작업을 마쳤다. 회장 선출에서는 현직 회장 우선 심사제를 없애 특혜 시비 등 잡음이 불거질 가능성을 차단했고, 외부 저명 인사로 구성된 회장 후보 인선 자문단을 구성해 공정성을 높였다.
사외이사 선임도 강화했다. 사외이사 후보추천자문단의 후보 발굴 역할을 확대해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였고, 사외이사의 전문성과 청렴서 등에 대한 평가도 매년 실시하기로 했다. 이러한 개별 평가를 통해 사외이사들의 책임감과 독립성을 강화하여 선진 지배구조 문화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의도다.
최 회장은 지난 2018년 7월 포스코 9대 회장으로 취임한 뒤 2021년 3월 연임에 성공했다. 이후 정권교체가 이뤄짐에 따라 한때 업계와 정치권에서 최 회장의 중도 사퇴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무사히 임기 완주 목전까지 왔다.
최 회장은 선임 때부터 포스코의 첫 역사를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 서울대 금속공학과 출신들이 놓치지 않았던 포스코 회장직에 처음으로 오른 지방대(부산대) 출신이다. 이번에 완주에 성공한다면 포스코 역사상 처음으로 임기를 완주한 회장이 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회장의 급작스러운 불명예 퇴진은 포스코 그룹이 장기적 경영 전략을 짜는데 큰 방해요인"이라며 "잔혹사를 끊어내야 치열해지는 글로벌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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