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섭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돌 속 갇힌 김대건 신부가 자유로워졌다[인터뷰]

이영경 기자 2023. 12. 2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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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외벽에 설치된 김대건 신부 성상을 조각한 한진섭 작가를 21일 개인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바티칸에 서다’ 개인전이 열리는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이준헌 기자

지난 9월, 가톨릭 성지인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상이 세워졌다. 김대건 신부의 성상은 550년 동안 빈 채로 있던 대성전 우측 외벽 벽감에 맞춤한 듯 들어갔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두 팔을 온화하게 펼친 김대건 신부 성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도미니코 성인 등 유럽 수도회 설립자들의 성상이 세워져 있던 바티칸에 동양인 성상이 설치된 것은 처음이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처음에 김대건 신부 성상 제작을 맡게 됐을 땐 굉장히 영광스러웠죠. 그런데 막상 작업을 하려고 하니 너무 힘들었어요. 심리적 부담감에 어깨가 무거웠죠. 작업을 할 땐 힘들어서 많이 울었어요. 조각은 그림과 달라서 각도마다 다르게 보이거든요. 가까이서 만들 땐 괜찮은 것 같았는데, 막상 내려와서 보면 아니고. 이쪽에서 보면 괜찮은데, 저쪽에서 보면 아니고.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했죠. 이 조각을 망치면 작가로서의 생명도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기 살기로 매달렸던 것 같아요.”

김대건 성상을 조각한 조각가 한진섭을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났다. 가나아트센터에서는 김대건 신부 성상 제작 과정을 담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바티칸에 서다’가 열리고 있다. 김대건 성상 제작을 위해 바티칸 교황청에 제출한 4가지 모형 샘플과 제작 과정을 기록한 영상 및 사진자료, 그동안 한진섭이 작업해온 성상 조각을 포함해 약 30점을 선보인다.

바티칸에 설치한 것과 동일한 형태로 크기만 줄인 60㎝ 크기의 김대건 신부상도 볼 수 있다. 김대건 신부상의 축소본 앞엔 실제 성상 제작에 쓴 대리석 조각이 함께 전시돼 있다. 뽀얀 대리석 조각은 깨끗하다 못해 투명해보일 정도였다. 한진섭이 두 대리석 조각을 맞부딪치자 ‘쨍’ 맑고 단단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한진섭 조각가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설치한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의 축소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래 대리석 조각은 실제 성상 제작에 쓰인 대리석이다. 이준헌 기자

“이 돌을 찾는 데만 5개월이 걸렸어요. 이탈리아 대리석 고장으로 유명한 카라라 석산에서 찾았는데, 미켈란젤로도 이곳에서 돌을 구했죠. 김대건 신부상 조각 높이가 3.77m인데, 돌은 4m가 넘어야 돼요. 한 덩어리로 된 큰 돌을 찾기가 어렵고 무늬나 점, 금이 없어야 돼요.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돌 속은 더 알 수 없죠. 겉에는 없던 무늬나 상처가 나오기도 하죠. 하지만 이 돌은 전혀 없었어요. 기막힌 돌을 찾은 거죠. 야무지고 땅땅한 느낌에 딱 보는 순간 ‘이 돌이다’ 생각이 들었어요.”

작업은 지난 1월부터 8월 말까지 이탈리아 서북부 도시 피에트라산타에서 8개월간 이뤄졌다. ‘완벽한 돌’을 찾았지만 조각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소박하고 단순화된 형태의 조각을 선보였던 한진섭에게 바티칸이 의뢰한 사실적인 성상 조각은 새로운 차원의 과제였다. 김대건 신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연구를 하며 성상의 형태를 잡아갔다. 대전교구청 의뢰로 2.2m의 김대건 성상을 만든 경험이 길잡이가 됐다. 담대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을 주는 김대건 성상은 이렇게 탄생했다.

김대건 신부 성상은 두 팔을 펼친 자세다. 당초 한 손에 십자가를 들고 내밀며 선교를 하는 모습 등을 만들었지만, 바티칸에서는 수백년의 세월에도 마모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포즈를 선택했다. 수천년을 이어온 바티칸의 시간 감각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한진섭은 바른 자세의 조각상에 미묘한 움직임의 디테일을 불어넣었다.

“자세히 보면 김대건 신부님의 머리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졌어요. 정대칭이 아니에요. 다리는 오른 쪽에 살짝 무게를 더 실었죠. 양쪽 다리에 힘을 주고 오래 서 있으면 불편해요. 그래서 한쪽 다리에 살짝 힘을 더 실으면서 골반과 어깨의 각도 등을 비대칭적으로 표현했죠. 약간의 변화를 통해 보는 사람이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요. ‘정중동’을 표현하고자 했죠.”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설치된 김대건 신부의 성상. 좌대에는 한글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라고 적혀 있다. AP 연합뉴스

한진섭은 앞에서 보이지 않는 조각의 뒷면까지 완성도 있게 조각했다. 외벽 안쪽에 가려져 앞에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부분이지만, 갓을 쓴 머리의 뒷모습과 도포의 곡선까지 부드럽고 매끈하게 마무리했다.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갇힌 생명체를 해방시켜주는 게 조각가로서의 일이라고 했어요. 조각을 통해 돌 속에 갇힌 김대건 신부님에게 자유를 찾아줘야 하는데, 미완성된 ‘노예’ 상태로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작업을 도와주던 이탈리아 장인이 시간도 없는데 안 보이는 뒷부분을 열심히 조각한다고 투덜댔어요.”

바티칸은 처음엔 이탈리아 조각가가 성상 제작을 맡기 원했다. 낯선 한국인 조각가에게 성 베드로 대성전 벽을 수백년 이상 채울 성상 제작을 맡기는 것이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한진섭이 4m에 가까운 조각상의 설치와 제작 계획을 완벽히 세워가자 교황청은 승인했다. 이는 ‘신의 한 수’가 됐다. 지난 9월 김대건 신부 성상 축복식에서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은 “김대건 신부를 시작으로 이제는 각 민족과 나라를 대표하는 성상을 성 베드로 대성전에 모실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에 성상 모형 선물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현지시간) 바티칸 교황사도궁 클레멘스홀에서 한국 순례단으로부터 선물받은 김대건 신부 성상 모형을 손에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각가 한진섭’에게 성상 제작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내가 계획해서 된 일은 아니다. 한진섭은 김대건 신부 성상을 조각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 종교적인 답을 내놨다. 조각가 한진섭과 천주교 신자 한진섭을 분리할 수 없듯, 김대건 신부 성상 조각은 그에게 조각가와 신자의 정체성이 합일되는 운명적인 경험이었다.

“바티칸에서 조각가의 자격으로 천주교 신자일 것, 돌을 잘 다루는 사람일 것을 요구했어요. 제가 돌을 한 50년간 만졌거든요.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며 조각을 했기에 이탈리아 작업 시스템에 익숙했죠. 또 경기 안성의 제 작업실 근처에 김대건 신부님의 묘가 있는 미리내 성지가 있어요. 김대건 성상을 만들기 위해 내가 이런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각을 하다 4m 높이에서 떨어진 적이 있는데 몸을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았어요. 김대건 신부님이 지켜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십자가 은총의 빛, 2000, 대리석, 43 x 43 x 113 (h)cm, 16.9 x 16.9 x 44.5 (h)in. 가나아트센터 제공
착한 목자와 착한 양들, 2022, 대리석, 38 x 29 x 92 (h)cm, (좌) 38 x 17 x 30 (h)cm, (우) 40 x 18 x 32 (h)cm. 가나아트센터 제공

전시장엔 한진섭이 조각한 십자가, 성가족상 등이 함께 전시됐다. ‘십자가-은총의 빛’은 정육면체의 돌을 연결해 만들어 사방 어디에서 봐도 십자가 형태를 띤다. 부드러운 모서리, 돌의 거친 질감을 살린 표면 등이 조형적으로 아름답다. ‘착한 목자와 착한 양들’은 길 잃은 양을 들고 있는 목동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정겨우면서도 소박한 한국적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작가의 독창성과 고유성이 드러난 ‘한진섭의 십자가, 한진섭의 성상’이다.

그는 ‘한진섭만의 김대건 신부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교황청의 엄격한 요구와 제약이 따르는 성상 말고, 조각가 한진섭의 작품 말이다. “김대건 신부님 조각을 더 자유롭게 발전시켜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듭니다.” 이어 “김대건 신부님의 뜻처럼 세상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내년 1월14일까지. 무료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설치된 김대건 신부 성상을 조각한 한진섭이 ‘십자가-은총의 빛’ 조각상 옆에서 웃고 있다. 이준헌 기자

☞ 순교 177주년 되는 날, 바티칸에 김대건 신부 성상···동양인 최초
     https://www.khan.co.kr/culture/religion/article/202309171200041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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