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에서 노벨상이 나오다...데니소바의 '구석기 동굴' 이야기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2023. 12. 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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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38> 알타이 산맥, 데니소바 동굴
아누이 강에서 바라본 데니소바 동굴 입구 모습. 20여m 위 절벽에 위치해 있다.

러시아 남중부 시베리아의 데니소바(Denisova) 동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그리고 몽골 국경이 만나는 알타이 산맥 북쪽 사면에 위치한 데니소바 동굴은 전 세계 고고학 유적 중 유일하게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곳이다. 그만큼 이 동굴의 발견은 고대 인류사 연구에 획기적이고 중요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 동굴에서 얻은 자료들은 인류의 진화 과정을 설명할 때 전제됐던 기본 틀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욱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유적에 대한 연구 결과물이 우리 한민족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에도 한줄기 단서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간 언어적인 측면에서 한민족과 알타이와의 관련성은 많이 언급됐지만, 구석기 시대 이 지역 인류와 한민족과는 대체 무슨 관련이 있을까?

데니소바 동굴 위치.

데니소바 고고학 캠프

시베리아 중앙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남쪽으로 10시간을 넘게 달렸다. 간간이 작은 마을도 보였지만, 대부분 시커먼 타이가(taiga) 숲이 끝없는 평원을 지키고 있다. 알타이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흔적이 점차 끊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부드러운 곡선의 민둥산엔 듬성듬성한 자작나무 숲이 허연 아랫도리를 드러낸 모습으로 지친 여행자의 시선을 시원하게 한다. 수도하러 입산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적막한 곳이다.

‘이렇게 먼 오지에 무슨 사람들이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알타이 산자락 곳곳에는 구석기 시대 이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 고분과 관련 있다는 파지리크 적석총(Pazyryk 積石塚)도 알타이 산.의 남쪽에 있고, 데니소바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똑같은 적석총들이 있다.

데니소바 고고학캠프 전경.

오브(Ob) 강의 지류 아누이(Anuy) 강이 흐르는 좁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 바닥에서 20여m 높은 절벽에 데니소바 동굴이 있다. 이어 통나무집들로 이뤄진 데니소바 고고학캠프가 강이 휘도는 작은 언덕 위에 나타난다. 러시아 고고학자 데레비안코(A.P. Derevianko) 교수가 데니소바 동굴을 조사하기 위해 건립한 베이스캠프다. 여름에 캠프가 열리면 파시(波市)처럼 세계 각지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열띤 토론을 하는 곳이다.

데니소바 동굴 입구의 관광객 행렬.

데니소바 동굴

원래 이 석회암 동굴은 오늘날 동굴의 이름이 된 ‘디오니시’(Dyonisiy)라는 무당이 거주했던 곳인데, 지역 사람들은 곰바위라고 불렀다. 1970년대 이후 고고학자들이 꾸준히 조사한 끝에 △동굴은 3개의 깊은 방으로 구성돼 있으며 △오랜 세월 흙이 22개의 지층을 이루며 켜켜이 쌓여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발견 당시에는 석회 마루가 퇴적층을 덮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지층에는 네안데르탈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르발루아’(고급 석기 제작 기술)가 보인다. 또 4만5,000년 전 현생 인류의 돌날 석기들도 발견돼, 유럽지역 문화가 이 지역까지 빠르게 확산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뼈바늘, 타조알로 만든 장신구나 작은 뼈 인물상들은 상당히 발달한 수준의 문화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데니소바 동굴 발굴 조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과학원 고고민속연구소 제공

동굴 흙에서 DNA를 찾았다고?

최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고고학적 사건이 이곳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생했다. 자발라 교수와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 팀이 동굴에서 발견된 175개의 샘플에서 고인류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추출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의 유전자다. 과거에는 죽은 사람의 뼈에서도 유전자를 추출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흙에도 유전자가 있을 것’이라는 인류학자의 기대가 대단한 반전을 가져온 것이다. 역시, 창의적 도전이 새로운 발견을 만들어 낸다.

더 놀라운 것은 유전자 분석에서, 갈래가 다른 여러 종의 인류가 이 동굴에서 살았던 것으로 확인된 점이다. 가장 오래된 인류는 데니소바인으로 25만 년 전에서 17만 년 사이에, 그후에는 네안데르탈인들이 이 동굴을 차지하고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현생 인류는 약 4만5,000년 전 이 동굴에 나타났던 것으로 확인된다.

데니소바 동굴 3개의 방 중 동쪽 방 9번째 지층에서 발굴된 석인석기들.

2014년 발굴된 2,300여 점의 뼛조각들을 분석해 고인류의 뼈를 찾아냈다. ‘DC11’으로 명명된 이 뼈는 1.68g에 지나지 않은 아주 작은 조각이었지만, 바로 이 뼈의 주인공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인류임을 밝혀냈다. 특히 13세 소녀로 추정되는 이 뼛조각의 주인공은 네안데르탈인계 어머니와 데니소바인계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혼혈’로 밝혀졌다. 이는 두 가지 다른 고인류종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확인된 최초의 고인류다.

눈금을 새긴 뼈장신구. 러시아과학원 고고민족문화연구소 제공

그리고 이 DC11은 인류 진화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종(種, Species)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이 고인류학에서는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현생 인류가 과거 각 지역에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 등 여타 고인류를 모두 대치했을 것이라는 ‘대치설’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됐다. 인류의 진화는 소위 ‘종’ 간 유전자 교류로 이뤄졌다는 것을 명확하게 증명한 것이다.

고대 인류 유적 분포 현황

데니소바인 ‘유전자 분포’가 의미하는 것은?

데니소바인의 존재는 데니소바 동굴의 22개 지층 중 11번째 층에서 발견된 작은 손가락뼈에서 처음 확인됐다. 막스 프랑크 연구소의 스반테 파보 (Svante Paaboㆍ스웨덴) 박사가 이 손가락뼈에서 추출된 유전자가 현생 인류나 네안데르탈인의 것과는 다른 유전자임을 밝혀낸 것이다. 그리고 이 ‘절멸한 인류종(種)’의 유전자 발견으로 파보 박사는 2022년 노벨상(생리의학상)을 받게 됐다.

이 연구를 토대로 네안데르탈인은 물론,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현대인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도 확인됐다. 실제로 데니소바 유전자는 동남아시아 섬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널리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유럽 지역 주민에게는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네안데르탈인 화석은 유럽과 중근동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며, 사실 알타이 지역은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발견되는 가장 동쪽 경계다. 결국 시간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양분해 두 개의 서로 다른 인류종이 분포하는 형국이다.

러시아 과학자들이 유전자 분석을 위해 토양 샘플을 채취하고 있다. 러시아과학원 고고민속연구소 제공

데니소바인의 기원과 동아시아 인류

그렇다면, 데니소바인은 어디서 생겨나서 이곳 알타이 지역까지 확산됐을까?

현재 기원지를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일단, 데니소바 유전자가 오늘날 동남아시아 섬 지역 주민에게서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이유는 섬 지역이 새로운 유전자 유입이 제한된 환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류 화석 중, 달리인(Dali man) 등 머리뼈 형태가 데니소바인 계통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있다. 한반도에 가까운 것으로는 최근 새롭게 주장되는 만주 하얼빈 강가의 화룡동인(Dragon Man)이 그렇다. 이 화석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다른 지역 화석에선 볼 수가 없다.

이렇듯 고인류 화석 분포, 유전자 분포로 볼 때, 데니소바인은 동아시아, 혹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나 북쪽 시베리아로 확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데니소바 동굴은 바로 확산 지역의 서쪽 경계선에 해당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기원이 되는 유전자 흐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근동에서 시작된 데니소바의 석인석기 문화는 몽골을 거쳐 한반도로 왔다. 하지만 데니소바인 유전자 분포에서 보듯, 인류의 이동은 동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결국 구석기 시대 알타이 지역은 유라시아의 동쪽과 서쪽에서 발생한 사람ㆍ문화가 교차한 곳이었다.

고대 인류인 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 현생 인류와 같은 종으로 분류되는 호모 사피엔스가 계통학적으로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표현한 그림. 노벨상위원회 제공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융합 학문의 힘

‘돌을 짜서 피를 얻어라.’ 구석기 시대를 연구하는 고고학 분야의 유명한 격언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시베리아 알타이 산중의 데니소바 동굴에 이렇게나 드라마 같은 인간 진화의 역사가 숨어 있다니.

이런 비밀을 밝혀낸 중요한 요인은 최근 무섭게 발달한 유전자 분석 기술의 공로도 있지만, 세계 각지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비상한 질문과 가설을 던지고 이에 답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돌을 짜서 피를 얻으라’는 격언이 실현된 것이다. 국경과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융합적인 연구가 오랫동안 끈질기게 이어졌고, 이런 학문 환경이 결국 고고학 유적 연구 과정에서 노벨상까지 나오게 한 근원적 이유다.

최근 연구ㆍ개발비를 무작정 줄이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이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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