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2005년 1월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 증권사에 입사해 주식매매 영업을 맡았다. 2010년 대리, 2015년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관련 경력을 쌓아갔다. 2017년 12월 근무지를 옮겼다. 입사 뒤 세 번째 지점이었다.
전보 이후 A씨 실적은 이전보다 나아졌다. 지점장은 A씨에게 실적을 밀어주며 격려도 했다. A씨는 2018년 2월23일 아내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작년에 수익 기준으로 지역본부 소속 160명 중 90위였는데, 올해는 50위를 했고 30위 안에 들고 싶어.”
실적 개선은 불안의 그림자도 키워갔다. A씨는 2017년 11월부터 항우울제·항불안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퇴사한 후배 이야기를 하면서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전 지점에서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다른 지점으로 전보 발령된 후 1년 후 또다른 지점으로 전보 발령됐는데, 그 지점에서 부진자 교육이 있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고 몇 달 후 퇴사했어.”
실적에 대한 욕심이 커지면서 A씨는 예전보다 소리도 많이 지르고 짜증도 늘었다. 그는 2018년 3월19일 아내에게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잡아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질주하는 기분”이라며 “이번에도 회사에서 인정을 못 받으면 그냥 열심히는 하지만 성과는 그럭저럭인 직원 정도로 남을 것 같다”고 했다.
A씨는 지인들에게도 실적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놓았다. 그는 2018년 4월 초 전 직장동료에게 “죽고 싶다. 영업직은 전생에 죄를 가장 많이 지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했다. 같은 해 6월의 어느 밤엔 중학교 동기에게 연락해 “그냥 사라지고 싶다”고 했다.
피로도 잊을 정도로 영업에 몰두했지만 실적은 갈수록 나빠졌다. A씨가 일하는 지점은 해외종목 투자에서 2018년 6월 말 누적 실적 기준으로 지역본부 21개 지점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A씨는 같은 해 2분기 종합평가에선 지점 직원 5명 중 3위, 해외종목 투자에선 최하위였다.
A씨는2018년 6월25일 지점장과 함께 지역본부 출장을 다녀온 뒤 울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상반기 실적 마감일이 6월30일인데 최근 주요 고객이 이탈해 실적이 나빠졌다.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A씨는 하루 뒤인 6월26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익명으로 압박감을 토로하는 글을 올렸다. “인생이 마치 하나의 과업, 숙제처럼 느껴진다. 나중에 커서 잘 되려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고, 그 덕에 하위 50%보다 상위 50%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들어 과연 내가 나를 위해 살았는지…. (중략) 이런 생각을 하는 중년들이 있는지 궁금하고 나만 그런 건가 싶다. 아마 전생에 착한 일을 많이 했더라면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 한낱 돌이지 않았을까 싶다.”
A씨는 2018년 7월1일 자택에서 스스로 삶을 등지려 했고 이틀 뒤인 7월3일 숨졌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A씨의 아내는 2019년 11월 A씨가 업무상 스트레스로 숨졌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례비를 청구했다. 공단은 2021년 9월 A씨가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은 점, A씨의 업무량 및 업무시간이 가중된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사망과 업무 간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심사청구에서도 산재 승인이 되지 않자 A씨 아내는 지난해 8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창원지법 행정1부(재판장 이정현)는 지난 7일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신규 고객을 유치하고 기존 고객을 관리하는 업무를 했던 A씨로선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치료를 받는 경우 낙인 효과를 우려해 적극적으로 진료를 받지 못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사망에 이르기 전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부터 정식으로 진단을 받지 못했다는 사정만으로 A씨에게 업무상 재해의 원인이 되는 정신적 이상 상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업무시간과 관련해선 “근로계약상 업무시간은 주 40시간이었지만 A씨 휴대전화 문자메시지·통화내역을 보면 A씨는 근로 시작 전이나 후에도 고객들로부터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받아 고객 응대를 했다고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유족 대리인인 조애진 변호사(법무법인 시대로)는 “재판부는 노사협의회 회의록, 언론 보도 등을 토대로 초과근로가 만연한 조직문화, 노동자를 쥐어짜는 성과평가제도 등 고인에게 업무상 스트레스가 된 요소들을 빠짐없이 적시했다”며 “만약 재해조사가 이처럼 치밀하게 이뤄졌다면 유족이 소송까지 오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으면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생명의 전화 ☎1588- 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앱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