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없었다면 워렌 버핏도 없었다…찰리 멍거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지식人 지식in]

이진명 기자(lee.jinmyung@mk.co.kr) 2023. 12. 24.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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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납니다. 최근에 알려진 여러 부고 중에서 두 사람의 거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11월28일과 11월29일에 있었던 부고인데요, 찰리 멍거와 헨리 키신저 입니다. 오늘은 찰리 멍거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찰리 멍거. 금융계에서는 흔히들 알고 있는 이름입니다만, 일반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워렌 버핏은 누구나 다 아실 겁니다. ‘오마하의 현인’이라고도 불리지요. 세계적인 투자자로 버크셔 해서웨이라는 투자회사의 대표입니다. 찰리 멍거는 바로 버크셔 헤서웨이의 2인자이자 워렌 버핏의 파트너입니다. ‘절친’이라고 해도 무색하지 않을 인물이지요.

바로 그 찰리 멍거가 지난 11월28일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금융투자자로 꼽히는 워렌 버핏조차 “찰리 멍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니, 버핏의 명성과 버크셔 해서웨이의 성공적인 투자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을지 짐작할 만합니다. 실제로 찰리 멍거의 조언은 버크셔 해서웨이의 기업가치를 초창기 수천 만 달러 수준에서 약 7850억 달러로 성장시켰고, 버핏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찰리 멍거의 삶
그럼, 우선 멍거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1924년 새해 첫 날, 찰리 멍거가 오마하에서 태어납니다. 오마하는 버핏의 고향이기도 하죠. 실제로 멍거의 집과 버핏의 집은 2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하니 사실상 한 동네 사람이었던 거죠. 멍거의 어린시절은 그다지 평온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태어나고 5년 후에 대공황이 시작되어 10년간 지속되었으니 청소년기가 굉장히 궁핍했을 듯합니다. 실제로 멍거는 소년 시절 버핏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수퍼마켓에서 ‘알바’를 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멍거는 군에 입대해 기상학자로 복무합니다. 그리고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합니다. 아마도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학사학위 없이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한 것이었거든요. 아무튼 멍거는 그렇게 학업을 마치고 1948년 변호사가 되어 서부로 옮겨가 유명 로펌에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멍거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낸시 허긴스라는 여성과 결혼을 했지만 금새 이혼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위자료를 지급하느라 살 집마저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됩니다. 그리고 멍거가 가장 아꼈던 아들이 9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멍거 스스로도 이 시기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고 합니다.

1956년 멍거는 동료의 소개를 통해 낸시 보스윅이라는 여성을 만나 두번째 결혼을 하게됩니다. 그 이후로 멍거의 삶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959년 고향 오마하에서 만찬 파티가 열리게 되는데 여기서 버핏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됩니다. 물론 멍거가 어린 시절 버핏 할아버지의 수퍼마켓에서 일했던 것이나, 두 사람의 집이 아주 가까웠다는 것으로 미뤄볼 때,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잘 아는 사이였겠지요. 단지 버핏이 멍거보다 6살 어리다는 점만 빼면요. 이 때 버핏이 어린 시절 친했던 동네 형 멍거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변호사는 취미로 해도 괜찮은 거 아닌가요? 제대로 성공하려면 나처럼 투자를 해야지요.” 버핏이 농담으로 던진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멍거에게는 상당히 도발적인 말로 들렸을 겁니다. 이 말 때문에 멍거는 투자자로 전업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1989년 연례총회에서 연설하는 워렌 버핏과 찰리 멍거(맨 오른쪽)
3년 후 멍거는 버핏과 함께 하기로 결정합니다. 버핏은 민주당원이었고 멍거는 공화당원이었지만, 정치적 성향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멍거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자신의 동료 6명과 함께 버크셔 해서웨이와 함께하는 멍거톨레스앤올슨이라는 로펌을 새로 설립하는 동시에 자신의 투자자문회사인 휠러멍거앤드컴퍼니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시즈캔디스 같은 회사에 초창기 투자를 시작합니다. 이 초기 투자가 성공하자 멍거는 1965년 로펌을 그만두고 투자회사에 집중합니다. 솔직히 멍거는 변호사보다는 투자자로서 더 소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로펌을 그만둔 후 10년 간 멍거의 투자실적은 다우존스지수 평균 상승률보다 4배 높은 성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78년 버크셔 해서웨이와 멍거의 투자회사가 합병하고, 멍거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버크셔 해서웨이는 승승장구합니다. 버핏과 멍거의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죠.
멍거의 투자전략
이쯤되면 멍거의 투자철학과 투자스타일을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죠. 멍거는 ‘가치투자’ 창시자입니다. 지금은 익숙한 용어지만 당시에는 금융계에서 꽤나 신선했던 모양입니다. 멍거의 투자스타일은 저평가된 주식을 일찍 알아보고, 주식보유기간을 정했으면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자신이 선택한 기업을 믿고 기다린다는 것이 현실에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뉴욕의 유명 펀드매니저인 휘트니 틸슨이 멍거의 ‘가치투자’를 종교에 비유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실제로 멍거 자신도 가장 중요한 투자철학으로 ‘인내심’을 앞세웁니다. 멍거의 투자스타일을 집대성한 책이 있습니다. ‘가난한 찰리의 연감’이라는 책인데요, 이 책에서 멍거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결코 좋은 투자자는 아니다.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 결국에 성공한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손실과 역경에도 미치지 않고 견디는 능력이 중요하다.” 젊은 시절 역경을 견뎌낸 멍거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말 같지 않나요?

멍거와 손을 잡기 전까지 버핏의 투자 스타일은 조금 달랐습니다. 벤자민 그레이엄 컬럼비아대 교수가 펼친 투자전략이었는데, 대차대조표를 통해 자산이 저평가된 기업을 고른 후 시장잠재력 수준으로 주가가 회복되면 이를 매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멍거가 합류한 후 이러한 투자스타일에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저평가된 기업을 고르는 것까지는 비슷하지만, 주가가 기대수준으로 올라왔다고 해서 매각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보유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애초에 저평가된 기업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견고한 기업을 찾아나선 것이지요. 버핏이 1996년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멍거는 단순히 싸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버크셔 해서웨이의 투자전략은 성장성이 견고한 기업을 선택한 후 영원히 보유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기간 동안 버크셔 해서웨이가 거액을 투자한 기업은 코카콜라, 가이코, 웰스파고, 질레트, 덱스터 등입니다.

버핏과 멍거의 이같은 투자스타일은 당시 월가의 많은 투자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단타매매가 확산하던 월가에서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이같은 투자스타일을 특이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멍거는 또 복리의 힘을 강조했습니다. 주식투자에서는 배당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재투자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100만원을 투자해 매년 10%씩만 배당을 받는다면, 주가상승률을 제외하고도 30년이면 초기 투자액의 17배의 넘는 수익이 발생합니다. 이를 근거로 멍거는 투자대상을 물색할 때,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덜 받을 것’, ‘지속적인 현금흐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런 기업들이 결국 배당률이 높고, 꾸준한 주가상승률을 보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투자할 기업을 고를 때, 공시된 재무제표보다는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만든 재무제표를 활용했습니다. 반짝 이익을 내는 기업을 걸러내고, 제품이 실제로 시장에서 경쟁우위를 갖고 있느냐를 살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코카콜라였구요, 주식을 영원이 보유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멍거는 1994년 서던 캘리포니아대학 연설에서 “코카콜라의 최대 장점은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소비된다는 것이다. 이는 특정 국가의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덜 받고, 지속적인 현금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했습니다.

멍거가 이 세상에 남긴 것들
멍거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미국 가족계획연맹과 로스앤젤레스의 선한사마리아인병원, 스탠포드대 로스쿨 등에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하버드 웨슬레이크 스쿨과 코스트코 이사회에서 자신의 재능을 기부했습니다. 10여년 전 버크셔 해서웨이 연례총회에서 멍거는 100년 후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공정하게 번 돈을 현명하게 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건 어린 시절 내 아버지가 나에게 한 충고”라고 했습니다.
2019년의 워렌 버핏(왼쪽)과 찰리 멍거
이외에도 멍거는 우리에게 많은 철학적인 인사이트를 남겼습니다. 멍거에 관한 책을 쓴 한 작가가 멍거에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느냐”고 물었을 때 멍거는 “크고, 고급스런 집에서 살고, 비싼 차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독립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기업을 발굴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했던 그는 “공부는 나에게 일이 아니었다. 단지 놀이였다. 선천적으로 호기심 많은 나를 즐겁게 해주는 놀이였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몇 가지 명언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한 기업에 투자하고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기다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버는 지는 알고 있지만, 어떻게 돈을 써야할 줄을 모른다.” “투자스타일은 그 사람의 인생을 반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욕심 때문에 이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투자는 굉장히 쉬운 작업이다. 투자가 어렵다면 그 이유는 투자자 본인 탓이다.”

정말 마음에 와닿는 말들이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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