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또는 한정식, 마음의 전쟁과 희망의 존버
해마다 연말이면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을 선정한다. 그럴 때 ‘올해의 드라마’도 빠지지 않는데 내게 ‘올해의 드라마’를 꼽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2023년 내가 사랑한 드라마들은 각각의 이유로 좋았고, 아무리 좋았어도 싫은 점이 하나씩은 있었으니까. 드라마 박애주의자의 슬픈 운명이랄까. 그럼에도 ‘올해의 드라마’를 꼽아야 한다면, 2023년 이 지면에 소개하지 못한 드라마 중 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소개하고 싶다. 그리하여 공개하는 ‘2023년의 ○○’ 드라마 편.
#2023년의전쟁같은사랑 <사랑의 이해>
<사랑의 이해>를 보면서 오래전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을 생각했다. 두 드라마 모두 계급이 다른 이들 간의 사랑에 관해 까칠하고 비관적 관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발리에서 생긴 일>과 다른 면이 있다면, <사랑의 이해>는 파국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놓인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는 점. 그걸 지켜보자니 참 답답했다. 한편으로는 왜 점점 사랑이 불가능한 사회가 돼가는지 이해됐다. 이해하지 못할 면과 이해할 수도 있는 면이 마음에서 전쟁을 일으킨 드라마.
#2023년의음식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이혼한 뒤 아들과 함께 사는 출판사 대표 정다정(김서형)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채 살아간다. 그러다 점점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그런 다정에게 이혼한 남편 강창욱(한석규)이 찾아와 (전)아내를 위해 밥을 차려준다. 요리할 줄 몰랐던 창욱은 다정을 위해 요리를 배우고, 다정은 창욱이 정성껏 신중하게 만든 요리를 천천히 받아들이며 생의 마지막을 보낸다. 드라마는 조미료 없이 끓인 맑은 탕처럼 특별한 사건 없이 흐른다. 사실 ‘특별한 사건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한 존재가 생을 마감해가는 과정, 그걸 함께 겪어야 하는 가족의 슬픔이 오롯이 담겼는데 어떻게 ‘사건’이 아닐 수 있을까. 그래서 다정이 무언가를 먹을 수 있을 때 함께 안도했고, 먹을 수 없을 때는 함께 울었다. 음식을 매개로 인생, 관계, 죽음을 골고루 생각해볼 수 있는 정갈한 한정식 같은 드라마.
#2023년의고구마 <트롤리>
지방 소도시 영산에 사는 김재은(김현주)은 친구 진승희(류현경)의 쌍둥이 형제이자 그 지역 유지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재은은 ‘서울대 법대 입학한’ 가해자의 장래를 위해 “이깟 일로 소란 일으키지 말자”며 돈으로 회유한 그의 엄마에게 설득당할 뻔하다가 용기 내어 경찰에 고발한다. 그 일로 가해자는 자살하고 재은은 도리어 ‘살인자'라는 비난과 죄책감에 시달리다 도망치듯 떠나 김혜주로 개명해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그의 과거가 밝혀지며 일상이 흔들리고, 삶의 균열은 다른 균열로 이어진다. 드라마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선명한 구분점을 지워버리고 각 인물을 ‘트롤리 딜레마’(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를 예로 든, 희생과 책임에 관한 윤리학 사고실험)에 빠지게 한다. 이렇게 각자의 딜레마가 복잡하게 얽혀 진실은 뭉개지고 피해자가 도리어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적 구도에 균열을 내고 의미 있는 질문을 하게 한다는 면에서 인상 깊은 드라마지만, 이야기를 너무 꼬아버려서 고구마를 욱여넣는 것 같았다. 고구마 좋아한다면 추천.
#2023년의홍익인간 <아라문의 검>
<아스달 연대기>를 조용히 열광하며 본 ‘아스달리언’으로서 <아라문의 검>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라마는 최초의 국가 ‘아스달’을 통해 인간을 착취하고 자연을 짓밟는 문명, 이방인을 향한 멸시와 혐오,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탐욕스러운 전쟁을 비판적으로 그리며 문명과 인간의 길을 묻는다. 이런 드라마의 지향점을 잘 드러낸 인물은 아스달의 대제관(교황) 탄야다. 특히 “너희들이 나고 자라고 사는 그 모든 것 중에 사람에 기대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그러니 너희는 서로 돕고 자애로우라. 그것이 너희를 돕는 것이다. 또한 너희들이 먹고 자고 입는 그 모든 것 중에 세상에 기대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그러니 너희는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다소 ‘홍익인간’스러운 탄야의 세계관은 ‘문명’으로 일컫는 것들이 ‘어떻게’ 문명일 수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띵작’이지만 본 사람이 드물어 안타까운 드라마.
#2023년의커플 <남남>
모녀관계는 참 복잡하다. 사랑은 하는데 징글징글하고, 미워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 <남남>은 그런 모녀관계의 복잡성을 경쾌하게 담은 드라마다. 딸은 있지만 미혼인 엄마 김은미(전혜진)와 그런 엄마의 보호자이자 애인 역할을 하는 딸 김진희(최수영)는 친구처럼 지낸다. 이들이 친구 같을 수 있는 이유는 서로를 ‘남남’으로 대하기 때문. 이런 인식은 오히려 복잡하고 징글징글한 (가족)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틈을 만든다. 그런 틈을 통해 이른바 ‘정상가족’이라는 고정관념, 엄마와 딸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기대를 재인식하고 재구성하게 만들었다.
#2023년의참고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정신병’에 관한 편견과 경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정신질환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참고서 같은 드라마. 그래서 이 드라마에는 유난히 증상과 대처법을 비롯해 그 질환을 겪는 이들의 심리까지 설명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어떤 장면에서는 그 ‘설명적 자아’가 과하게 튀어나와 방해되지만, 대체로 유익했다. 특히 공황장애를 물이 차오르는 것으로, 우울증을 땅이 늪으로 변해 나를 삼키는 것으로 구현하는 등 정신질환을 시각화하여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줘서 좋았다. 이 드라마의 사려 깊은 재현 덕분에 정신질환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임을, 그게 나일 수도 있음을 자각하고 점검하도록 든든한 예방주사를 맞은 느낌이다.
#2023년의돈지랄과힘자랑 <힘쎈여자 강남순>
여성이 돈과 힘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계로 유전되는 괴력을 가지고 태어난 여성들이 자신이 가진 힘으로 신종 마약범죄를 소탕하는 <힘쎈여자 강남순>은 그 질문에 관한 대답인 것도 같다. 드라마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반전시켜 마음껏 ‘돈지랄’과 ‘힘자랑’을 하며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체제의 핵심인 돈과 힘을 전복적으로 활용한다. 즉, 자신을 위해 돈과 힘을 사(악)용하려는 이 자본주의적 세계에서 대안적 지향점을 보여준 셈이다. 이런 상상이 나쁘지는 않다. 발랄한 여성 서사로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다만 힘없고 돈 없는 이들은 그 착한 자본가나 성공한 여성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모순과 한계도 고스란히 드러난 드라마.
#2023년의영웅 <무빙>
가족애를 강조한, 뻔하고 올드한 휴머니즘 드라마인 줄만 알았는데 강풀 작가에게 설득되고야 말았다. 좁은 의미로서 ‘가족’을 지키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사랑을 지키는 이야기이며,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하는 게 그게 무슨 영웅이야”라는 미현(한효주)의 말처럼 힘과 능력을 재정의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저마다 힘을 가지길 원하고, 불의를 처단하겠다는 선한 마음도 ‘안티 히어로’라는 힘을 가진 존재로 상상할 수밖에 없는 팍팍한 사회에서 <무빙>은 힘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새로운 영웅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2023년의역마살 <박하경 여행기>
<박하경 여행기>에서 국어 교사 박하경(이나영)은 19세기 말 유럽에 유행처럼 생겨난 ‘미치광이 여행자’들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질문한다. “그들은 과연 미쳐서 여행을 떠난 걸까? 그대로 살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떠난 게 아닐까?” 이런 질문을 품고 하경은 어느 날 문득,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 딱 하루씩 여행을 떠난다. 어찌 보면 심심한 구성인데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현대인이라면 느낄 법한 일상의 피로와 외로움, 사라지지 않는 절망과 슬픔의 단면을 사려 깊게 보여줬고, 자신을 돌볼 틈과 타인을 향한 이해와 존중의 공간을 넓혀줬다. 게다가 30분 남짓의 분량에 템플스테이, 여행, 빵지순례 등 젊은 세대의 트렌드와 ‘한국의 맛과 멋’을 살뜰하게 반영했다. 이 드라마 보고 여행 계획을 세운 사람이 나뿐일까? 2024년에는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떠나야겠다.
#2023년의존버 <무인도의 디바>
만약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다면 언제까지 생존할 수 있을까? 일주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은데 서목하(박은빈)는 무려 15년을 버틴다.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사고를 당해 낙오된 무인도에서. 그가 아버지와 함께 산 춘삼도도 그에게는 무인도나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그를 구할 수 없었고, 가수라는 꿈을 이루기에는 세상으로부터 너무 먼 곳이었으므로. 목하와 함께 춘삼도에서 탈출한 정기호(문우진)에게 섬은 아버지의 폭력 그 자체였다. 기호는 육지로 나가 성인이 돼도 그 ‘섬’에서 온전하게 탈출하지 못한다. 이 드라마에서 ‘섬’은 트라우마와 좌절된 꿈을 은유한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섬’을 가지고 있다. 목하가 15년 동안 ‘딱 오늘만’ 살자는 마음으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느 날 우연히 떠밀려온 ‘아이스박스’ 덕분이었다. 그곳에 담긴 라면이 그를 살렸다. 그 아이스박스에 담긴 것은 라면만이 아니었다. 희망도 함께 있었다. 우리 각자의 ‘섬’에서 희망을 잃지 말고 ‘존버’ 하면 ‘섬’에서 온전히 탈출할 날이 있을 것이란 가느다란 희망 말이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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