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나…어둠 속 헤매는 기시다
“총리의 지도력 부족” 비판 속 일본 국민 58% “조기 퇴진하라”
(시사저널=박대원 일본통신원)
12월19일 오전,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가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와 5위에 해당하는 니카이파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자민당은 5대 파벌로 아베파·아소파·모테기파·기시다파·니카이파(순위 순) 등이 서로 경쟁하고 있다. 아베파와 니카이파는 정치후원금 모금을 위한 정치자금 파티와 관련해 의원별로 파티권 판매 수량을 할당하고 초과판매액에 대해서는 소속 의원들에게 캐시백을 제공하는 형태로 비자금을 마련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단, 아베파는 파벌 측과 소속 의원 측 모두 정치자금 수지보고서에 해당 내역을 전혀 기재하지 않은 반면, 니카이파는 파벌 측 보고서에 지출, 소속 의원 측 보고서에 수입으로 기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비자금 조성이 자민당 일부 파벌의 일탈행위인지 자민당 차원의 조직적인 위법행위인지 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기시다 총리는 소속 파벌 기시다파를 스스로 탈퇴하고 "자민당 각 파벌의 부정축재 의혹을 나 자신부터 앞장서서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아베파 영향력 벗어나 홀로서기 시도하나
12월14일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을 비롯한 아베파 각료(장관) 4명은 사표를 제출했다. 마쓰노는 자신의 사임 이유에 대해 "정치자금 사태로 국민의 정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으며, 본인의 정치자금 보고서에 대해서도 여러 지적이 있어, 국정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사직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결국 기시다 내각에서 외무상을 역임한 바 있는 하야시 요시마사 등 비(非)아베파 의원들이 공석이 된 각료직을 대체하게 되었다. 아베파 소속 부대신(차관) 5명도 사실상 경질되었다.
그러나 아베파 '손절' 이후 기시다 총리는 신임 각료 인사와 관련해 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가장 먼저 관방장관 후보로 검토되었던 무파벌 하마다 야스이치 전 방위상이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에서 더 적합한 인재가 있을 것"이라며 관방장관 자리를 고사한 것이다. 하마다의 거절로 인해 기시다는 하야시 전 외무상을 관방장관에 임명하게 되었다. 하야시는 아베 전 총리와 '견원지간'으로 불리며 야마구치현의 지역구 통폐합 과정에서도 아베파와 마찰을 빚은 인물이다. 아베파 소속 각료 전원을 비아베파 인물로 교체한 것에 대해 기시다 총리는 "소속 파벌이 어디인가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향과 사정을 감안해 판단했다"며 "당 전체가 일치단결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 정계에서 자민당 파벌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다. 2004년 8월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가 일본치과의사연맹으로부터 1억 엔(약 9억원)의 후원금을 받고도 이를 정치자금 수지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후 도쿄지검 특수부가 정치자금규정법 위반 혐의로 하시모토파(모테기파의 전신)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바 있다. 그리고 19년 만에 아베파와 니카이파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진 것이다. 두 파벌 사무실에 대한 이례적인 압수수색에 현직 각료 중 니카이파 소속인 고이즈미 류지 법무상과 지미 하나코 지방창생담당상의 향방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미 아베파 소속 각료 전원은 사실상 경질되어 비아베파로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이즈미 법무상의 경우 검찰청을 지휘·감독하는 법무장관이 자신의 소속 파벌(니카이파)에 대한 수사를 공정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겠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즉각 해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당내에서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자민당과 함께 연립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공명당의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도 "(총리가) 인사권자로서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있는 대응을 해주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기시다 총리는 니카이파 출신 각료 2명에 대해선 해임 없이 직책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강한 위기감을 갖고 국민의 신뢰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일본 정가에서는 기시다 총리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최대 파벌인 아베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꾀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갖고 있다. 기시다가 아베파 소속 의원들을 각료 및 당 간부에서 배제하는 한편 재발 방지를 위해 정치자금규정법 개정도 고려하겠다며 강력한 정치 개혁 의사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시다 내각에 대한 지지율 하락은 멈추지 않고 있다. 12월16~17일 실시된 교도통신의 여론조사에서 기시다 내각에 대한 찬성 지지율은 22.3%, 반대는 65.4%로 나타났다. 2009년 8월의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참패한 직후 실시된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당시 자민당 아소 내각에 대한 지지율이 14.2%였던 점을 고려할 때 지금의 지지율은 위험한 수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8%가 기시다 총리의 '조기 퇴진'을 희망한다고 답했다. 기시다 내각에 대한 일본 국민의 불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이다 마사미치 메이지대학 교수는 "여론은 각료 몇 명의 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기시다 총리에게 지도력이 없다는 평가도 확산되고 있다"며 "비자금 문제로 내각뿐 아니라 자민당의 지지율도 하락하고 있어 당분간 반전이 어려울 것 같다"고 지적했다. 기시다파 내부에서조차 기시다 총리가 현재 직면한 난국을 타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제시되고 있다. "도쿄지검 특수부 조사가 진전되면 지지율이 한 자릿수가 될 가능성도 있다"거나 "원래도 내각 지지율이 낮았는데, 비자금 문제가 직격탄을 날려 바닥을 쳤다" 같은 반응이 나오고 있다.
기시다, 내년 3월 사임할 것이란 전망도
이번 사태로 아베파가 직격탄을 맞고 있어 자민당 파벌 구도에도 큰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아베 전 총리가 워낙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해온 탓에 지난 2차 아베 내각의 8년8개월 장기 집권 폐해로 자민당 정치인들의 양심과 준법의식이 무너진 결과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권 유지를 위해 아베파의 비자금 마련 관행이 비일비재해진 것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야마구치 지로 호세이대학 교수는 "장기 집권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아베 전 총리가 벚꽃 스캔들(아베가 지역구 주민을 고급 호텔로 초청해 향응을 제공한 사건)이나 모리토모 학원 스캔들(일본 재무성이 아베 측근이 운영하는 사학재단에 국유지를 헐값에 분양하고 이를 숨기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한 사건)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권력남용을 일삼으며 정권을 유지해 왔으며, 이를 옆에서 지켜본 아베파 의원들의 준법의식이 저하되어 위법행위를 반복하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기시다 총리가 아베파를 내각 및 당 요직에서 배제하는 꼬리 자르기식 사태 수습에 나섰음에도 도쿄지검 특수부는 아베파 사무실뿐 아니라 니카이파 사무실까지 압수수색하며 수사 확대를 예고했다. 기시다 내각이 비자금 의혹을 "아베파만의 문제로 축소하려고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검찰 수사가 아베파와 니카이파 외에 타 파벌로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 정계에서는 내년 3월의 예산안 통과 이후 기시다 총리가 사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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