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부동산 개발 규제 풀자…‘노원의 봄’ 찾아왔다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3. 12. 2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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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택지지구 개발사를 따라 걷다 (3)
1954년 미군이 촬영한 중랑천 일대의 모습. 중앙에 보이는 건물이 서울공대(현 서울과기대) 건물이다. 천을 따라 논밭이 이어져 있다. [인터넷 캡쳐]
‘주택 500만 호 건설’이라는 표어 아래 고덕과 개포, 목동에 신시가지 개발을 시작한 전두환 정부는 더 이상 삽을 꽂을 곳이 없자 서울 북동부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새로운 택지로 낙점된 곳은 서울 상계·중계동 일대였습니다. 이 지역은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고지대로 둘러싸인 평탄한 지대로, 예로부터 드넓은 논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마들 평야’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경기 양주군에서 1963년 1월부로 성북구로 서울에 편입된 이 지역은 중랑천과 넓은 평지를 따라 논밭이 이어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1968년 북한 게릴라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를 계기로 수도방위 안보문제가 대두되며 이곳을 비롯한 서울 동북부의 상당 지역이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수도권 방위전략에 따라 일대의 모든 개발에 제동이 걸렸고, 관련 법령에 따라 2000년대까지 개발이 유보되었습니다. 실제로 1970~80년대를 거치며 영동지구와 잠실지구 등이 개발되고, 도시가 팽창할 때에도 서울 북동부는 개발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소외되었습니다. 당시 도시계획 및 도봉구 도시기본계획을 살펴보면 동일로의 설치 외에 지역 개발 현안이 전부 보류된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시는 도심 무허가건물을 철거하면서 철거민을 수용하기 위해 도봉구에 450가구, 상계동에 600가구가 입주할 수 있도록 106동의 연립주택을 완공하였다. 1964년 11월 열린 연립주택 입주식(왼쪽)과 연립주택단지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상계·중계 택지지구는 비슷한 시기 개발된 목동 택지지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개발 이전 논밭이었던 목동처럼, 상계·중계동도 비닐하우스가 늘어선 농촌이었습니다. 또한 도시민의 식량자족을 위해 대부분 절대농지로 지정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안양천과 인근 토지가 오염되며 목동이 농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듯, 마들 평야의 논밭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중랑천 주변이 준공업지역으로 지정되며 각종 공장들과 폐기물 매립장이 들어섰고, 여기서 배출하는 매연과 폐수 등으로 환경오염이 지속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상습 침수구역인 점도 공통점이었습니다. 지난 화에서 안양천 범람이 잦은 저습지였던 목동 일대의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마들 평야 역시 중랑천보다 지반이 2m정도가 낮아 비가 오면 침수가 되곤 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기피하는 환경이었기에 도시빈민들이 모여들어 천변을 따라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이에 더해 상계동에는 이전 청계천이나 도심지 무허가주택 정비사업 과정에서 강제 이주당한 철거민들이 모인 달동네도 산발적으로 존재했습니다.

1985년 창동차량기지 완공 직후의 모습. 멀리 노원역과 상계역이 보인다. [서울메트로]
1985년 노원역 일대. 역사를 제외하고는 황량한 벌판이 펼쳐져 있다. [서울메트로]
택지 개발 최적지로 선정된 상계·중계동은 삽을 뜨기에 앞서 그동안 개발의 족쇄가 되었던 각종 규제로부터 풀려납니다. 절대농지 대부분이 해제되었고, 가장 제약이 되었던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부터 1985년 3월부로 벗어납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상계·중계지구는 택지개발예정지로 지정되었습니다.

막상 신시가지를 조성하려고 하니, 낮고 견고하지 못한 지반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냥 아파트를 지으면 홍수나 호우 시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아파트를 세울 수 있을 정도의 단단한 지반 조성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이에 엄청난 인원과 자재가 투입되었습니다. 연인원 1,260만 명이 막대한 양의 흙과 철근 11만 t, 시멘트 500만 포, 벽돌 3억 2000만 장을 들여 땅을 다졌습니다. 이는 동일한 신도시급인 과천(1만 3,500여호), 개포(1만 5,710호)의 두 배가 넘는 초대형 공사였습니다.

성냥갑 모양을 탈피한 주공아파트
1987년 상계 신시가지 아파트 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매경DB·대한민국역사박물관]
상계·중계지구는 전체를 5개 지구로 구분해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개발공사, 서울시가 참여한 가운데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약 650만㎡ 달하는 면적에 주택 8만 7000여 호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를 각 지구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85년 4월 지정된 331만㎡ 면적의 상계지구에는 대한주택공사가 4만 가구를 공급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160만㎡의 중계지구에는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주택 2만 5천 호를 지었습니다. 이후 134만㎡의 중계2지구에는 대한주택공사가 1만 7000 호를, 33.4만㎡의 상계 2·3지구에는 서울시가 5,600가구를 건설했습니다.
상계주공아파트와 단지 내 설치된 고가수조타워. [아파트문화사]
공공주도의 택지개발이었던 만큼 상계·중계지구의 아파트 대부분은 ‘주공’의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상계지구에는 19개의 주공아파트 단지(상계주공 1-16단지, 창동주공 17-19 단지)가, 중계지구에는 10개의 단지가 들어섰습니다. 중산층을 겨냥한 중대형평형 위주의 목동 아파트와는 다르게, 이곳에는 소형평형을 중심으로 공급했습니다. 실제로 상계·중계 택지지구 아파트 가운데 60㎡ 이하의 소형 주택은 전체의 73.8%를 차지했고, 85㎡ 초과 주택은 7.2% 수준으로 이마저도 민간을 통해 공급되었습니다. 개발 초기 단계에서 대한주택공사는 중형 아파트를 포함한 다양한 평수의 공급을 구상했으나, 확정 단계에서 정부는 서민주택 규모를 하향 조정하고 이를 상계지구부터 적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정부의 주택 공급계획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었는데, 소형평수의 비중을 늘려 기존 계획보다 약 1만 1000호의 주택공급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1988년 9월 상계지구 상가 분양현장의 모습. 145개 점포 분양에 1,126명이 응찰. 평균 7.8: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매경DB]
1987년 9월 상계주공아파트 분양 현장에서 입주 신청자들이 단지 안내문을 살펴보고 있다. [매경DB]
지금은 대부분의 단지가 재건축을 추진 중이기 때문에 외관은 낡고 허름한 모습이지만, 준공 당시 상계동과 중계동 주공아파트에는 시대를 앞서나간 혁신적인 시도가 여럿 존재했습니다. 일부 단지에는 조부모, 부모, 자녀 3대가 한 곳에 살 수 있는 구조의 ‘3대 가족형 아파트’가 도입되었습니다. 이 구조의 도입은 노인 부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환기시키고 핵가족화에 따른 주택수요를 덜기 위한 정책적 목적이었습니다. 아파트 외관에도 다양한 변화를 주었는데, 판으로 찍어낸 듯 네모난 아파트에서 탈피해 외에 Y자와 U자, V자, L자 등 다양한 모양의 건물을 배치했습니다.

그중 백미는 상계주공4단지 412동입니다. 25층으로 지어진 이 동은 건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 층수를 기록했습니다. 옥상에 2층의 건물과 헬리패드까지 지어진 것으로 보아 대공감시 및 경계의 목적이 설계에 반영되었을 것이라 추측되기도 합니다. 건물의 중앙층에는 뻥 뚫린 중정이 있었는데, 이곳을 입주민이 이용하는 ‘공중 정원’으로 활용했습니다.

1986년 4월 청량리에서 상계지구 아파트 모델하우스까지 무료버스가 운행하고 있다. [매경DB]
1990년 1월 미도파백화점 상계점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1992년 3월 완공된 백화점의 모습. 현재는 롯데백화점 노원점으로 영업중이다. [매경DB]
상계·중계지구의 아파트가 분양을 준비하던 시점에는 목동 아파트가 미분양이 나기도 하는 등 주택 경기가 침체기로 돌입한 상황이었습니다. 상계동은 교통이 좋지 않은 데다 철거민 정착지라는 이미지가 있어 분양이 더욱 쉽지 않을 것으로 예견되었습니다. 분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 전략이 도입되었습니다. 주택공사는 1,214㎡(368평) 규모의 견본주택을 짓고 지상파를 통해 분양 홍보 영상까지 방영합니다. 지금은 아파트 분양 과정에서 견본주택과 홍보영상 모두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상공에서 바라본 노원구 상계·중계동 일대 아파트 단지 전경. [매경DB]
‘주택 500만 호 건설’의 득과 실
지금까지 서울 택지지구 개발사를 3개 화에 걸쳐 살펴보았습니다. 맨 처음 이야기했듯 전두환 정부의 ‘주택 500만 호 건설’은 실현 불가능했지만, 택지개발을 통해 176만여 호의 적지 않은 주택보급이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택지지구 개발이 마무리되던 1990년대 초 들어서 주택보급률은 크게 상승곡선을 그렸습니다. 목동과 상계, 고덕, 개포를 개발과 함께 서울 외곽의 미개발지나 낙후지역이 시가지화 되었습니다.
1987년 대한주택공사 아파트 분양현장의 모습. [매경DB]
정부나 공공이 주택공급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를 지나면서입니다. 개발이익의 지역 환원 및 지방재정확충 등을 위해 지자체에 의한 공영개발을 확대하는 목적으로 서울, 대구에 지방공사가 설립되었고, 각 시도에 공영개발사업단이 발족했습니다.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에 한국토지개발공사와 대한주택공사 뿐 아니라 서울시가 유력 주체로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노태우 정부 들어서는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과 함께 서울 내 택지개발 대신 ‘1기 신도시’로 대표되는 서울 근교의 대규모 택지개발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서울 내에서는 소규모 택지개발이 진행되었는데, 이 때 개발된 곳이 강남구 수서지구(1만 6000호)와 중랑구 신내지구(1만 2000호), 마포구 상암지구(6,300호)입니다.

1982년 9월 상계동 철거민들이 집회를 열고 주거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매경DB]
각 지역의 특성이 택지개발지에 녹아들지 않고, 아파트 위주의 획일적인 공급이 주가 되며 몰개성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1980년대 택지개발의 한계로 꼽힙니다. 특히 택지개발촉진법에 의한 토지 수용 과정에서 토지 소유주의 재산권 침해가 발생하였고, 철거민과 세입자의 경우 주거대책 마련이 없어 개발 과정에서 갈등과 저항을 낳기도 했습니다. 목동·상계동의 원주민들과 판자촌 주민들은 이주의 대가로 아파트 입주권을 약속받았지만 저소득층이 부담하기에 새 아파트의 입주권은 너무 비싼 금액이었습니다. 거주지를 잃고 쫓겨난 이들은 철거민연대를 조직해 투쟁을 이어갑니다.

<참고자료>

ㅇ 권영덕 외 7인, 서울도시계획사 제3권 「1981~1995년의 도시계획」, 서울역사편찬원

ㅇ「아파트 숲이 된 북서울」, 서울역사박물관

ㅇ 장박원, 이유진「아파트 문화사 」, 네이버캐스트 연재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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