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우두법을 처음 소개한 지석영

김슬기 서울대 과학학과 박사과정 연구원,이창욱 기자 2023. 12.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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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과학동아 제공

송촌 지석영은 19세기 말 조선에 서양식 천연두 예방법인 ‘우두법’을 들여온 인물이다. 최초로 우두법을 개발한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에 빗대 ‘조선의 제너’라고도 불린다. 그의 우두법은 조선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개화기 지식인 지석영의 인생을 살펴보자.

조선 철종 6년인 1855년에 태어난 지석영은 조선 말기의 한의사이자 문신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치명적인 전염병인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는 ‘우두법’을 들여온 것이다.  그러나 우두법은 유일한 천연두 예방법은 아니며 이전에도 한반도에는 다른 종류의 천연두 예방법인 ‘인두법’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지석영은 한반도에 우두법을 소개한 유일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석영이 우두법 전파자로 유명해진 이유는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지배하던 일본의 기획과 홍보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인들은 천연두 예방 접종을 받지 않으려 심하게 저항하기도 했다.

의혹 1 우두법 전에도 천연두 예방법이 있었다. 과학동아 제공

천연두는 천연두바이러스 감염으로 발생하는 전염병이다. 1980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천연두 근절을 선언하기 전까지, 천연두는 치사율 약 30%에 전염성도 매우 높은 위험한 병이었다. 특히 회복된 이후에도 65~85%의 사람들이 피부가 수포로 덮이는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했다. 조선 사람들에겐 ‘마마’라는 극존칭으로 불릴 만큼 무서운 존재였다.

지석영은 조선에 서양식 천연두 예방법인 ‘우두 접종법(우두법)’을 보급해 유명해졌다. 우두법은 천연두와 비슷하나 훨씬 독성이 적은 소의 전염성 질병인 ‘우두’에서 나온 면역 물질을 활용하는 예방법이다. 우두를 앓은 소의 고름이나 딱지에서 백신을 뽑아내 사람들에게 접종하면 훨씬 안전하게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지석영은 1876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아버지의 친구이자 본인의 스승 박영선을 통해 우두법을 소개하는 책 ‘종두귀감’을 구해 읽고 우두법에 대해 알게 됐다. 1879년에는 부산의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 마쓰마에 유즈루에게 두 달 동안 의술을 배우며 접종법을 익혔다. 그는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에 들러 두 살배기 처남에게 우두를 접종해 그 효험을 실험했다.

그러나 우두법을 더 널리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우두에 걸린 소에서 뽑아낸 면역 물질인 ‘두묘’를 직접 만들고 관리할 줄 알아야 했다. 이에 따라 지석영은 1880년 5월, 수신사를 따라 일본에 직접 가서 일본인 의사에게 두묘 제조법과 저장법을 학습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1880년 9월에는 사비를 들여 서울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우두법을 보급했다.

그렇다면 지석영이 조선에 우두법을 소개하기 전까지 조선 사람들은 천연두에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었을까. 사실 조선에는 이미 천연두 예방법이 존재했다. 바로 ‘인두법’이었다. 인두법은 우두법과 달리 천연두를 앓은 사람의 상처에서 백신을 뽑아 다른 사람들에게 접종하는 방식이었다. 조선에 인두법이 소개된 때는 18세기 초엽이었다. 이때부터 1894년 우두법이 종두법(천연두 예방접종)의 공식적인 용어로 확정되기 이전까지 종두법이란 인두법을 의미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오명항(1673-1728)을 그린 초상화의 얼굴 부분. 사실적 화풍으로 얼굴에 천연두를 앓은 자국까지 표현했다. 천연두는 치사율 30%에 살아남은 후에도 심각한 흉터를 남기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좌), 종두침. 천연두 예방을 위해 백신을 피부에 접종할 때 썼던 바늘이다. 각 유리관에 여러 개의 종두침이 은박지에 싸여 있다. 광복 이후의 유물이다(우).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국립민속박물관

지석영이 우두법을 전파시키던 1880년대 조선 정부가 우두법을 공식적으로 천연두 예방법으로 확정한 이래로 인두법은 금지됐다. 우두법과 달리 인두법은 치사율이 1~2%에 이를 정도로 위험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두법은 민간에서 이미 널리 통용된 예방법이었다. 조선에서 인두법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통계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서양에서 같은 방법이 천연두 사망률을 크게 줄인 사실을 보면 조선 사회에서도 인두법이 집단 면역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의혹 2 지석영이 조선에 우두법을 처음 전파했다. 과학동아 제공

지석영은 우두법을 최초로, 혹은 유일하게 조선에 소개한 사람도 아니다. 조선에 우두법을 소개한 최초의 문헌은 정약용이 1798년에 편찬한 의서 ‘마과회통’이었다. 또 다른 조선 후기 실학자인 최한기가 쓴 ‘신기천험’에는 우두법이 정약용의 책보다 더 자세하게 소개됐다. 뿐만 아니라 이재하, 최창진, 이유현 등의 조선 의사들도 지석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우두법을 알았다.  지석영만 유일하게 우두법을 배우고 조선에 소개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두법을 전파시킨 사람=지석영’이라고 알고 있을까. 그 이유는 지석영이 활동한 시대의 분위기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지석영은 조선 정부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조선 정부 인사였던 박영선을 통해 우두법을 알게됐다. 박영선은 일본에 다녀온 수신사의 일행이자, 서기부사과의 직책을 맡은 정부측 인사였다. 박영선을 통해 우두법을 알게 된 지석영은 직접 수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서 일본인 의사에게 우두법을 배워오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지석영이 정부의 우두법 보급 네트워크 안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지석영은 1885년 충청도의 ‘우두교수관’에 임명돼 우두법 전문 의사를 양성했고 ‘우두신설’을 저술해 우두법을 정리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이것이 그를 조선의 우두법 보급을 대표하는 인물로 비춰지게 했다.

1887년 지석영은 갑신정변에 가담한 배후 인물로 지목되면서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를 갔다. 이 결과 이후 정부의 우두법 보급 정책에는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이렇게 소외됐던 그가 돌연 우두법의 전파자로 부활한 것은 40년 이상 지난 1928년 조선을 패망시키고 한반도를 통치하던 일본 조선총독부의 기획 때문이었다.

당시 총독부는 조선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할 요소를 지석영의 행적에서 찾아냈다. 그를 ‘일본인에게서 (근대적) 우두법을 학습해 무지한 조선 사회에 의연히 우두법을 보급한 인물’로 각색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문명 국가 일본’이 ‘비과학적인 조선’을 구원해 통치하게 됐음을 즉 일본의 조선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힘을 실어주는 근거로 쓰였다.

국가 주도의 우두 접종은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우두 백신이 비싸기도 했을뿐더러 효과가 항상 탁월하지 않았다. 강제적인 접종 집행도 반감을 키웠다. 과학동아 제공

조선 정부는 지석영 등의 인사들을 통해 우두법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려 노력했다. 1876년 개항 직후 몇몇 한의사들이 개인적으로 민간 차원에서 우두법을 시술했던 시기를 지나 조선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천연두 예방접종을 실시하려 노력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에는 전국 영아를 대상으로 의무 접종을 시도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부터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우두법 접종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1905년 을사늑약 후 일본 총독부의 우두 강제 접종이 시행되기 전까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우두법 시술에 대한 소위 ‘수구 세력’들의 강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두법 시술 거부는 단순히 인두법이 민간에 만연해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선 당시 사람들은 우두법의 천연두 예방 효과를 의심하고 있었다. 우두 접종을 한 사람들 가운데 천연두를 앓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나왔던 것이다. 우두 접종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3차까지 접종해야 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1차 접종에서 멈췄던 것이 이유였다.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2차, 3차까지 접종을 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있었다. 예컨대 1885년 기준, 우두 접종비는 1회에 5냥이었다. 5냥이면 하급미 반 말 정도를 살 수 있는 값이었으니 3차까지 접종하면 하급미 한 말 반을 정부에 지불하는 꼴이었다. 높은 접종비는 사람들이 우두 접종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게 했고 이는 1차 접종을 한 사람들도 천연두를 앓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민간에서 인두법을 시술하는 인두의나 굿을 통해 마마신을 물리치는 무녀들도 우두법을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치명률이 20%였으니 순전히 계산적으로만 접근하면 굿을 해서 살아남는 아이들은 80%였다. 이는 굿을 해서 천연두를 극복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우두법은 접종에만 집중한 방법으로 천연두를 치료하지는 못했다. 서양 근대식 예방법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이미 천연두에 걸린 사람들은 기존 한의학에 기대 치료를 해야만 했다. (나중에 일본 총독부에 의해 강조된) ‘근대 서양의 문명적 방법’인 우두법이 사실은 어떠한 치료도 제공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역시 총독부가 강조한) ‘구닥다리 조선의 비과학적 방법’인 민간 요법이 사람들을 구제했던 것이다.

나아가 일본 총독부의 폭력적인 강제 집행도 사람들의 반감을 키웠다. 미접종자를 마치 범죄자처럼 체포하고 총칼을 앞세워 협박하는 모습을 목도한 조선 사람들은 우두 접종을 강하게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즉 우두법의 보급은 순탄하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정부가 다양한 저항과 반대를 분쇄하며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든 역사였다.

※관련기사
과학동아 12월호, [과학사 극장] 지석영이 조선에 우두법을 처음 소개했다

[김슬기 서울대 과학학과 박사과정 연구원,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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