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스가 엘비스 프레슬리 음악을 듣고 자란 까닭 [음란서생]

배순탁 2023. 12. 24.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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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통해 질문을 받았다.

"1960년대 영국 뮤지션·밴드들이 1950년대 미국 음악의 영향을 그렇게 많이 받았느냐"라는 것이었다.

일례로 비틀스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한 미국 로큰롤 스타의 음악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미국 음악의 자양분을 듬뿍 흡수한 그들은 1964년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I Want To Hold Your Hand)'라는 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르고, 이후 미국 음악계는 온통 영국 밴드 천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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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국 미국은 새로운 음악을 원했다. 6000대였던 TV는 1200만 대가 됐다. ‘우주의 기운’은 엘비스 프레슬리로 향했다.
1957년 MGM 스튜디오에서의 엘비스 프레슬리.ⓒAP Photo

방송을 통해 질문을 받았다. “1960년대 영국 뮤지션·밴드들이 1950년대 미국 음악의 영향을 그렇게 많이 받았느냐”라는 것이었다. 일례로 비틀스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한 미국 로큰롤 스타의 음악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미국 음악의 자양분을 듬뿍 흡수한 그들은 1964년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I Want To Hold Your Hand)’라는 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르고, 이후 미국 음악계는 온통 영국 밴드 천지가 된다. 역사가 ‘브리티시 인베이전(The British Invasion·영국 침공)’이라고 기록하는 바로 그 현상이다.

우선 1950년대 미국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당시 미국은 승전 국가였다. 경제성장이 뒤따랐고, 세계 최강국 지위에 오를 것이 확실시되었다. 미국을 키운 8할은 두 차례 세계대전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뒤늦게 참전했고 무기를 팔아서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2차 세계대전의 경우, 직접 참전해 승리를 거두고 이후 강대국이 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전쟁 당시 미국은 부족한 군수품 생산 인력을 메우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실행했다. 청소년일지라도 일을 하면 성인과 동일한 월급을 주는 법을 한시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자, 어떻게 됐겠나. 전쟁이 끝났다. 과거와 달리 청소년들에게는 자기 힘으로 획득한 자본이 있었다. 인간은 돈이 생기면 자신만의 소비를 하길 원하는 법이다. 당시 최고의 오락은 음악이었다. 청소년들은 음악을 듣길 원했다. 단, 부모 세대와는 다른 음악 말이다. 바로 흑인 알앤비에 기반한 로큰롤이었다. 조사에 따르면, 1949년 미국 음반 구매자 중 약 3분의 1이 21세 이하였다. 그들이 구입한 건 당연히 알앤비·로큰롤 레코드였다.

물론 조건이 있었다. 당시 유행이던 알앤비·로큰롤을 하되 그것이 흑인음악이었음에도 ‘백인’ 가수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상해보라. 1950년대였다. 흑백 분리법(이자 사실상 인종차별법)인 짐크로법이 여전히 시행되던 시절이었다. 새 시대의 스타는 어쩔 수 없이 백인이어야 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었다. 1946년 미국에 보급된 TV는 대략 6000대였다. 한데 달랑 5년 뒤인 1951년이 되자 1200만 대로 훌쩍 뛰어버렸다. 따라서 이후 등장할 그 사람은 근사한 외모의 소유자여야 했다. 정리하자면 ‘온 우주의 기운’이 바로 그 남자, 엘비스 프레슬리를 향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제 질문을 해봐야 할 차례다. 대체 영국에서는 왜 저런 과정이 발생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유는 별거 없다. 1950년대 영국은 2차 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도 런던의 상황은 특히 심각했다. 반면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은 그나마 피해가 덜한 도시였다. 게다가 대서양과 마주한 항구도시라는 특성상 가장 빠르게 미국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1950년대 영국에서는 스키플(Skiffle) 뮤지션·밴드가 대거 등장했다. 요약하면 스키플은 미국 음악을 ‘조악한 수준’으로 재현한 장르라고 보면 된다. 왜냐하면 마땅한 악기를 구하기조차 어려웠던 까닭이다. 비틀스 멤버들도 스키플 밴드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1960년 말 영국에서 의무병제가 폐지되고, 이 영향으로 1961년부터 영국 내 기타 판매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음악을 향한 욕망의 폭발, 즉 위에 언급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초석이 마침내 닦인 것이었다.

배순탁 (음악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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