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2막] ‘사장님, 나빠요’ 블랑카…“이제는 개강사로 불러주세요”

김양혁 기자 2023. 12. 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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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근로자 ‘블랑카’로 하루 아침에 스타
“블랑카 이미지 강해…지우려 발버둥치기도”
“시간 지나니 고마운 일, 타이틀하며 살아”
“개강사(개그맨+강사)로 인생 2막 준비할 것”

‘100세 시대’라는 말이 통용되는 시대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6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일본, 스위스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평균 수명이 늘어난 상황에서 ‘인생 2막’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평균 퇴직 나이는 49세. 기대수명대로라면 퇴직 후에도 무려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도 피할 수 없고, 인생의 한 과정으로 겪어야 하는 인생 2막. 조선비즈는 인생 2막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개그맨이자 강사로 활동 중인 정철규씨. 멘사 가입증을 보여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양혁 기자

코미디 프로그램이 대세였던 때가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온 가족이 방송을 보려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잘 나가는 프로그램 시청률은 30%에 육박했다. 그야말로 코미디 전성시대였다.

당시 대학생 정철규도 코미디를 좋아했던 공대생이었다. 마음 한편이 간지러웠다. 병역 의무를 해결한 뒤 부모님을 설득해 2003년 경남 창원에서 서울로 상경해 개그맨이 되기 위한 오디션을 준비했다.

정철규는 “11월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며 “그때는 뭘 몰라서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2월 덜컥 KBS에 합격했다”고 회상했다.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그렇게 ‘블랑카’라는 이름을 하나 더 얻었다.

개그맨 정철규씨가 지난 2004년 KBS 폭스클럽에서 외국인 근로자 블랑카를 연기하고 있는 모습. /KBS 코메디 유튜브 캡처

2004년 그가 연기한 외국인 근로자의 애환은 전 국민 뇌리에 깊게 각인됐다. ‘사장님 나빠요’는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나이 불문, 남녀노소 누구나 따라 하는 유행어로 자리매김했다. 블랑카는 데뷔 직후 그에게 신인상까지 안겼다.

정철규는 “군대 대신 공장에서 3년 동안 일하면 군대가 면제되는 병역 특례 제도 기간 현장에서 만난 외국인 근로자들과 뒤엉켜 지내며 보고 느꼈던 것들을 블랑카로 풀어냈다”며 “개그 소재로 활용했지만, 당시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욕하거나 발길질하는 사례는 직접 현장에서 봐왔던 것들”이라고 했다.

블랑카로 고공 행진했지만, 결국 블랑카에 발목이 잡혔다. 대중에게 블랑카 이후 개그맨 정철규를 각인하는 일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자신에게 갇혔다. 우울증까지 겪으며 오랜 기간 공백기도 가졌다.

개그맨이자 강사로 활동 중인 정철규씨. 멘사 가입증을 보여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양혁 기자

끼가 많은 정철규는 답답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그는 개그맨 최초 멘사 정회원이자, 시빅 소사이어티에도 이름을 올렸다. 시빅 소사이어티는 세계에서 아이큐가 가장 높은 에반겔로스 카치울리스가 운영하는 국제모임으로, 상위 0.135%, 한국 아이큐 172 이상인 사람들만 가입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준 것도 블랑카였다. 블랑카를 받아들이며 개그맨이자, 강사로서 다문화 활동을 펼치기로 했다. 2018년 다문화 이해 교육 전문 강사 자격증도 땄다. 기업, 기관 종사자와 일반 시민은 물론, 한국으로 건너온 외국인을 대상으로 다문화부터 인권, 갑질예방, DEI(다양성, 평등, 포괄성)까지 폭넓은 강의를 이어가는 중이다.

정철규는 “지금 생각하면 블랑카를 기억해 주시는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며 “이제는 블랑카를 하나의 타이틀로 받아들이고 강사와 개그맨으로서 꾸준히 활동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개그맨이자 강사로 활동 중인 정철규씨가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양혁 기자

조선비즈는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정철규씨를 만나 과거 블랑카부터 현재 활동 중인 개강사로서의 삶, 앞으로의 미래 계획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요즘 자기소개를 부탁 받으면 개강사, 블랑카 정철규라고 합니다. 개그맨 겸 다문화 이해 교육 전문 강사라는 의미에요. 모든 문화를 열어주자는 의미로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는데 블로그명을 따서 ‘열린문화대표’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블랑카의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나.

“병역 특례라는 제도를 통해 군대 대신 공장에서 3년 동안 일했다. 공장에 다양한 국적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았다. 3년 동안 그들과 먹고 자고 함께 일했다. 개그 소재로 활용했지만, 모두 실제 봐왔던 것들이다. 욕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폭력, 임금, 차별까지 많은 외국인 근로자가 실제 겪었던 일들이다.”

─블랑카 이미지가 강렬했다. 다른 역할을 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이다. 어떻게든 블랑카 이후 다른 역할을 해보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고마운 캐릭터고, 헤어 나오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됐던 것 같다. 예컨대 배우 원빈씨가 출연했던 영화 아저씨를 대중들이 많이 기억한다. 그렇게 자신만의 타이틀을 얻은 것이다. 블랑카 역시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2004년 KBS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다고 들었다.

“사실 블랑카가 갑자기 뜨면서 특채로 데뷔했다 나중에 공채가 됐다. 개그맨 시험을 치기 전에 블랑카로 데뷔한 뒤였기 때문이다. 당시 블랑카 인기는 엄청났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개그맨 순위에서 꽤 오랜 기간 1위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별도 시험도 치지 않고 대외적으로는 개그맨이 된 셈이다. 방송사에서도 붙여주지 않기 난감했을 것이다.(웃음).”

─대학 졸업도 전에 개그맨이 됐다. 전공은 전기전자학이다.

“고등학교부터 이과 계열 공부를 하고 해서 대학에서 전기전자학을 전공했다. 당시만 해도 연예계가 열려 있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해야지 생각했는데 마음 한편에 계속해서 개그맨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병역 특례가 끝날 때쯤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당시가 11월쯤이었는데 어머니는 2월까지 안 되면 3월에 학교 복학을 해야 하니 올라오라고 했었다. 그런데 2월 7일에 됐다. 그때는 뭘 몰라서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였다. 학교도 개그맨이 되고 나서부터 복학해 졸업했다.”

─개인 SNS에서 아내와 함께 출연하는 콘텐츠가 많다. 아이디어는 누가 짜나.

“요즘 세상은 손안의 방송국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생각한 걸 모두 보여줄 수 없었다. 의견을 개진하고 안 되면 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예컨대 블랑카 캐릭터를 개그콘서트에 들고 갔더니 ‘재미없고, 암울하다’고 퇴짜를 맞았다. 이후 폭스클럽에 가져가니 담당 PD가 웃다가 쓰러졌다.

이제는 자유롭게 해보고 안 되면 그만하면 되는 세상이다. PD 눈에 들지 못하면 안 되던 세상에서 이제는 자유롭게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 안목이라는 게 100% 맞을 수는 없지 않나. 아내와 함께 다양한 콘텐츠를 무수히 만들고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많이 없어졌다. 이런 부문은 힘들지 않나.

“코미디 프로그램 자체가 예전만큼 명성이 올라가지 않는 분위기다. 그래도 선후배들이 열심히 하고 있다. 영상을 소비하는 문화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TV에서 한 프로그램만 봤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영상을 소비한다. 개인별로 유튜브 채널도 보유할 수 있어 질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게 핵심이다.”

─IQ가 굉장하다고 들었다.

“개그맨 최초 멘사 회원이자, 하이 아이큐 소사이어티 단체 중 하나인 시빅 소사이어티 멤버이기도 하다. 멘사는 45문제를 20분 안에 암산으로 풀어야 한다. 문제지나 답안지에 볼펜, 손톱자국이 있으면 실격이다.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

이후 시빅 소사이어티에서 재차 시험을 봤다. 시빅 소사이어티는 세계에서 아이큐가 가장 높은 에반겔로스 카치울리스가 운영하는 국제모임이다. 상위 0.135%, 한국 아이큐 172 이상인 사람만 가입할 수 있다. 거기서 시험을 쳤더니 172 아니면 그 이상으로 나왔다.”

─다문화 전문강사로 보폭을 넓힌 이유는.

“블랑카가 다문화 캐릭터였다. 개그맨처럼 강의하는 일도 마이크를 잡고 똑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강사를 하며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아무나 할 수 없을 것 같다. 자격에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

“다문화 이해교육 전문가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을 통해 자격을 받아야 한다. 서류를 넣고 통과하면 면접 보고, 합격 후 강의 시연도 한다. 이후 2박 3일 연수를 통해 어떻게 강의하는지도 배우게 된다.”

─주로 어디서 강의를 하나.

“전국에서 다 한다고 보면 된다.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부터 지방까지 모든 지역에서 한다. 경찰청이나 학교와 같은 공기관에서도 하고 일반 시민과 학생들까지 다양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최근 들어 강의가 너무 많았다. 11월 말부터 이날까지 딱 하루 쉬었을 정도다.”

─강의 준비 과정이 힘들지 않나.

“온라인에서 논문도 찾아보고 여러 자료를 모은다. 강사를 대상으로 매년 상반기에 연수 교육도 한다. 교육 과정에서 여러 강사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공유한다. 또 대학 교수분들이 코칭해주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강의가 있다.

“울산 울주군에 강의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결혼 이주 여성분들과 시어머니들이 많이 왔다. 강의하다 과거 개그맨하며 힘들었던 기억을 얘기하다가 울었다. 그때 청강자분들이 같이 울어주더라. 그분들 중 한 명이 SNS로 따로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와서 힘들었는데 강의를 듣고 너무 좋았다고 연락해 주셨다. 또 듣고 싶다며 자주 와 달라 하시더라. 너무 감동적이었다.”

─앞으로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있나.

“현재 다문화 강의뿐 아니라 인권, 갑질 예방, DEI(다양성, 평등, 포괄성)까지 다양한 분야를 강의하며 활발하게 지내고 있다. 개그맨으로 활동도 계속할 것이다. 44세인데 10년 정도 밑에 후배들은 최근 트렌드를 잘 읽고 개인 채널 운영을 잘하더라. 나만의 색깔을 담은 채널을 만들어 대중과 소통하고 싶은데 어렵더라. 앞으로 내 색깔을 담은 채널을 만들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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