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역사를 써나가는 그녀들…새해 새 역사를 쓸 우리에게 용기가 된다”[이진송의 아니 근데]
▲김혜수
30년 청룡영화상의 ‘진행자’ 작별
매년 연말 관심사가 되어온 드레스
대중을 의식하지 않는 과감한 노출
결국 항상 따라붙은 ‘파격’ 이미지
여성 육체에 퍼붓는 시선 견뎌낸
그녀는 관음증 세상의 ‘생존자’다
때는 2023년 12월. 해마다 이 시기면 이룬 것도 없이 또 한 살을 먹는다는 두려움과, 내가 가진 패가 점점 줄어든다는 생각에 초조한 사람이 많지.
나이 든다는 건 특히 여성에게 두려운 일이야.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트리 혹은 케이크라는 말을 아직도 많이 하거든. 24~25세가 지나면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야. 그리고 서른 살이 되면 청춘도,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끝난다는 풍문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끈질긴 악취를 풍긴다더라. 남자는 나이가 들면 와인처럼 숙성한다는 표현과 대조적이지.
그래서 오늘은, 30이라는 숫자와 관련 있는 3명의 여성 연예인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해.
김혜수는 이번 청룡영화상을 마지막으로 30년 동안 맡았던 진행자 자리를 내려놓는다고 밝힌 후 아쉬움과 환호 속에서 작별 인사를 했어. 김혜수는 청룡영화상을 주최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오랜 시간 청룡영화상 그 자체였지. 매년 연말이 되면 ‘김혜수 드레스’라는 키워드가 뜨거운 관심사로 떠올랐고. 언젠가 김혜수에 대해 “김혜수는 여자가 몸을 드러내는 것이 금기일 때는 몸을 드러내고, 반대로 여성의 노출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강해지자 오히려 꽁꽁 싸매버렸다”고 분석한 글을 본 적 있어. 그 통찰에 동의하며 이야기를 이어갈게. ‘김혜수 드레스’가 매년 화제였던 이유는, 그에게 따라붙는 ‘파격’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야.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김혜수의 드레스는 과감한 노출로 유명했거든. 그때는 아직 방송에서 육체를 드러내고 재현하는 방식이 보수적이던 때야. 특히 여성의 육체와 섹슈얼리티는 경찰이 미니스커트 길이를 단속하던 역사가 시사하듯, ‘풍기’를 ‘문란’하게 만들 수도 있는 위험 요소이자 공적 공간에 드러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졌어. 그런데 김혜수는 육감적인 외모로 인기를 끈 배우잖아? 성적으로 매력 있되, 여성이 그것을 주체적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이중 억압이 지금보다 훨씬 노골적이던 때야. 로라 멀비는 성적 불균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본다’는 쾌락은 능동적인 남성과 수동적인 여성으로 쪼개지고, 전통적으로 여자 주인공은 ‘봄’의 대상이 된다고 지적했어. 여성은 남성 관객의 응시를 받아 에로틱하고 수동적인 시각적 스펙터클로만 존재하지. 그런데 바라봄의 대상이 보는 주체의 허용을 초과하면, 권력 구도를 전복하는 효과가 발생해. 주체는 ‘봄’의 권력을 잃고 당황하지. 그것이 당시 김혜수의 노출이 ‘파격’으로 기능했던 맥락이야.
김혜수를 누군가에 비유하는 것은 조금 무례할 수 있지만, 인물을 둘러싼 세계를 볼 때면 아무래도 매릴린 먼로가 떠올라. 육감적인 외모와 독보적인 캐릭터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그만큼 무수한 오해와 왜곡에 시달렸던 배우. 백치미만 탐닉하고 관음하는 대중의 시선 때문에 그의 지적 면모 같은 내적 매력은 뒤늦게야 알려졌지. 김혜수 또한 독서광으로 유명하고, 국내에 번역본이 없으면 따로 번역을 맡긴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거든. 청룡영화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작품을 다 본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질 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도 조예도 깊고. 12월12일 유튜브에 올라온 ‘김혜수의 마지막 청룡영화상 출근길과 리허설 현장’ 영상에서 김혜수는 청룡영화상 대본을 받아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멘트를 직접 수정해. “누구를 소개할 때 이를테면 그들의 외모를 평가하면서 소개하는 것들은 배제한다”고 말한 김혜수는 외모보다 그들이 영화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강조하지. 20대와 30대 사이에 배우로서 커리어가 주춤할 때는 드레스로 화제가 되는 것도 싫었다는 김혜수는 여성의 육체에만 시선을 퍼붓는 세상에서 그야말로 치열하게 살아남은 셈이야.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거나 감추는 전략을 쓰면서. 그리하여 마침내 육체적 매력이 뛰어난 여성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던 역할, 형사나 검사, 판사(각각 <시그널>, <하이에나>, <소년심판>)를 훌륭하게 해내고, 다른 배우를 소개할 때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직접 실천하지. 여전히 김혜수에게는 ‘나이에 맞지 않게’ 관리를 잘했다는 육체적 매력에 대한 찬사가 따라붙어.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들이 김혜수의 저력이 그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아.
▲엄정화
데뷔 30년 맞아 성공적인 콘서트
가수에서 배우까지 영역을 확장
드라마 ‘닥터 차정숙’이 아니어도
세대를 가로질러 선명하게 각인
가혹한 여성 연예인 정년을 연장
그녀는 편견을 혁파한 ‘개척자’다
엄정화는 얼마 전 데뷔 30주년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치렀어. 데뷔 30주년 자체는 2022년이었지만, 작년까지는 코로나19로 공연 개최가 쉽지 않았고 올해는 <닥터 차정숙>의 흥행으로 엄정화가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은 참이거든. <닥터 차정숙>은 20년 넘게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가정주부가 의사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야. 고려대 축제에 등장한 엄정화가 “내가 누구야?”라고 묻자 “차정숙!”이라는 답변이 돌아올 만큼 인기를 얻었지. 그때 엄정화의 히트곡 ‘DISCO’가 흘러나오고, 엄정화는 “이 노래 몰라?!” 하고 외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던 학생들이 ‘머리는 아직 눈치 못 챘는데 몸이 먼저’ 박자에 맞춰 춤추기 시작하는 영상은 큰 화제였어. 199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가 지금까지도, 세대를 가로질러 가수이자 배우로서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되고 사랑받는다니 놀라운 일이지.
엄정화가 연기한 차정숙은 결혼과 출산, 육아로 ‘경력단절’의 시간을 보내다가 뒤늦게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인물이야. 엄정화는 BBC 인터뷰에서 “(데뷔 당시에는) 30세가 되면 주연을 맡을 수 없었고 35세가 넘으면 어머니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하기도 했지. 가수에서 배우로 영역을 확장하고, 여성 가수와 여성 배우에게 가혹한 연령의 제한을 견디고, 갑상샘암 수술로 인해 노래하지 못하는 시간을 이겨내는 동안 엄정화에게도 인지도가 떨어지고 대중에게서 멀어지는 시간이 있었을 거야. <댄스가수 유랑단>(tvN)에서는 이효리를 보고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실감했다고도 고백했지. 하지만 타인의 인정이나 애정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서기에 도전한 차정숙처럼, 꿋꿋하게 자신의 영역에서 균형을 잡은 엄정화는 지금의 엄정화가 되었어. 그리고 그 자신이 끝내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자신의 시대를 살고 있지.
▲홍진경
예능 프로에서 데뷔 30년 디너쇼
17살에 시작, 자신만의 길 걸으며
지금도 ‘청명한 푸르름’을 간직
여전한 ‘미친 예능감’의 소유자
모델부터 배우·가수·사업가까지
그녀는 한계를 넘어선 ‘혁신가’다
KBS 예능 <홍김동전>은 12월7일, ‘진경이 걸어온 길’을 주제로 ‘진경 데뷔 30주년 디너쇼’를 열었어. 홍진경의 후배이기도 한 모델들이 홍진경의 과거를 런웨이로 재현했지. 1993년 17세의 나이로 데뷔한 말괄량이, 이영자와 함께한 예능인으로의 도전, ‘미친 예능감’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준 <무한도전>의 ‘유럽춤’, <언니들의 슬램덩크>에서 안 되는 춤을 삐거덕삐거덕 따라 하며 울고 웃던 진정성…. 파노라마처럼, 홍진경의 30주년이 지나갔어. 그리고 ‘지금’의 홍진경이 마지막으로 런웨이를 걷지. 이 장면의 연출은 따뜻하고도 뭉클해. 홍진경은 “원래 꿈은 이 길이 아니었다”며 쉽지 않았던 연예계의 삶을 회고하지만, 자신과 함께 일했던 동료와 팬들이 있어 행복했다고 말하지. 홍진경은 모델, 예능인, 배우, 가수, MC, 사업가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마지막에는 홍진경의 어록이 화면에 텍스트로 떠. 홍진경 역시 예능에서 ‘바보’ 이미지가 강조되어서 그렇지, 글을 무척 잘 쓰거든. ‘홍진경의 편지’가 온라인에서 유명할 정도로. “나는 청명한 푸르름 서러운 세월을 숨기우고 바삭한 발걸음을 뗄 것이다.”(홍진경, 2008) 아직 어리고 풋풋하던 시절, 신체 자본을 큰 무기로 삼는 모델이라는 직업으로 데뷔한 홍진경은 15년이 지난 뒤에도 자신을 ‘청명한 푸르름’이라고 호명해. 30세가 넘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이마에 써주고 싶은 문장이야. 젊음이라는 건 또렷한 특권이기도 하지만 서툴고 어린 만큼 무겁기도 해서, 홍진경에게도 그 세월이 꽤 서러웠나봐. 그 시절을 잘 통과한 자신은 이제 건조하면서도 산뜻해져, ‘바삭한 발걸음’으로 계속 걸어나가는 거지. 한 인간의 가능성을 나이에 가두는 말을 툭툭 뿌리치면서.
물론 이 3명은 그 자신이 매우 빼어난 재능의 소유자면서 운이 좋기도 해. 궁극적으로는 뛰어나거나 운이 좋지 않아도, 나이를 기준으로 삶을 평가당하거나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가야겠지. 그럼에도 여성의 젊은 육체만을 유효한 신체 자본으로 제한하고 승인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역사를 써나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큰 용기가 돼.
그들이 지나온 길을 차분히 되짚어보면서, 다가오는 새해를 좀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어.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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