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에 세로 선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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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 이동경로가 담긴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참 많이도 이사를 다녔다.
그중 한두 번은 자발적인 이사였다.
학교에서 출발해 선생님 호각 소리에 맞춰 하나 둘 셋 넷을 외치고, 사이사이 목청껏 노래 부르며 1시간 남짓 걸으면 드넓은 동물원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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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풍경동물]
언젠가 내 이동경로가 담긴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참 많이도 이사를 다녔다. 성인이 되어 가족을 꾸린 뒤에만 열 번을 이사했고, 그전에 부모님과 살 때도 십수 번을 이사했다는 기록이 표에 담겨 있었다. 그중 한두 번은 자발적인 이사였다. 나머지는 모두 주머니 사정과 집주인의 처분에 따른, 어찌할 수 없는 이사였다.
내가 태어난 서울 마장동은 전국에서 가장 큰 소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그 뒤 용답동, 군자동, 답십리, 성수동, 화양동, 모진동, 능동, 구의동, 자양동을 전전했다. 하물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우물 안을 쉼 없이 옮겨다닌 셈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점을 찍어 이어보면 한가운데 드넓은 녹지가 나타난다. 동물원이다. 서울어린이대공원.
초등학교 6년 동안 단 한 번도 변함없이 소풍 장소는 어린이대공원이었다. 학교에서 출발해 선생님 호각 소리에 맞춰 하나 둘 셋 넷을 외치고, 사이사이 목청껏 노래 부르며 1시간 남짓 걸으면 드넓은 동물원이 나타났다. 그곳은 온종일 놀고 또 놀아도 놀거리와 볼거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천국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동물원은 세계여행의 직간접 체험이었고, 아프리카 동물은 그중 으뜸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대공원을 사이에 두고 집과 학교가 있었다. 도로를 따라 걸으면 돌아가야 했기에, 나와 친구들은 담을 타고 넘어가 동물원을 가로지르곤 했다. 지금은 무료지만, 그때는 유료였으니까. 늦은 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담을 넘어가 어두컴컴한 동물원을 배회하는 맛은 짜릿하다 못해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경비아저씨와 추격전을 벌인 뒤 떨구고 온 소지품 때문에 선생님에게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기도 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텐데, 이사를 거듭할수록 우리 집은 동물원과 가까워졌다. 입장료를 무료로 전환할 무렵엔 엎어지면 코 닿을 곳까지 옮기는 바람에 집에서 노느니 동물원에서 노는 게 편할 지경이었다.
어린이대공원은 2023년 개장 50년을 맞았다. 일본에서 골프를 배워 온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이 왕실 소유 땅 30만 평을 내놓아 경성골프구락부를 세운 자리였다. 이곳을 애용했던 박정희가 골프장을 옮기라 지시하면서 1973년 5월5일 어린이날에 맞춰 동물원이 열렸다. 여전히 남아 있는 박정희의 흔적을 찾는 건 이 동물원만의 색다른 재미다.
우물 안 이사조차 늘 힘들었다. 근대 동물원의 생성과 변화를 다룬 책들을 읽으면서 동물의 이사에 얼마나 큰 고통이 따르는지 알게 됐다. 먼 곳에 살던 동물일수록 삶의 이동은 단순 공간이동이 아니다. 어떤 동물은 옛 삶을 잊은 듯 우리 안에 주저앉지만, 어떤 동물은 밖을 넘본다. 그러다 빈틈을 노려 뛰쳐나간 것일까, 얼룩말 ‘세로’는.
2023년 3월23일 동물원을 탈출한 얼룩말이 주택가를 배회하다 오토바이 배달노동자와 딱 마주쳐 대치하는 듯한 초현실적 장면이 인터넷을 달굴 때, 나를 놀라게 한 게 또 있었다. 그 골목길, 내가 살던 곳이었다.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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