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이성에 대한 믿음 무너뜨린 이스라엘-하마스 전

조일준 기자 2023. 12. 23. 16:2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호모 미그란스]‘서양의 가치’ 시험대 올랐지만 서방은 여전히 ‘문명수호 성전’ 옹호
2023년 12월20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도심 광장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들을 상징하는 8천 켤레의 신발이 놓여 있다. EPA 연합뉴스

어김없이 한 해가 저물어간다. 세상은 크리스마스 시즌과 연말의 들뜬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다. 정작 예수가 태어나고 활동했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땅은 폭음과 비명, 죽음과 슬픔이 넘친다. 2023년 10월 중순, 아랍·이슬람권에선 한 서양철학자의 글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앞서 10월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정치세력 하마스의 기습 공격과 이스라엘의 대규모 반격으로 전쟁이 터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나는 수십 년 동안 진리, 이성, 휴머니즘, 가치, 윤리, 진보, 정의, 평등, 인권, 자유, 비판 정신과 같은 개념을 찬양하는 서양 계몽주의와 근현대철학을 가르쳤던 학생들에게 부끄럽습니다. 내가 학생 여러분을 속이는 데 가담한 것을 사과합니다. ‘서구’는 역사상 최대의 거짓말입니다.”

‘서양의 가치’ 도덕적 파산 선고

글을 쓴 사람은 모리타니의 누악쇼트대학에서 서양철학을 가르치는 무스타파 울드 아클리브 교수다. 이스라엘의 공격이 민간인 희생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무차별 살육극으로 치닫는데도 서방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두둔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묻어난다. 평생 서양철학을 천착하고 합리적 이성을 믿어온 삶에 대한 뼈아픈 부정이자, ‘서양의 가치’에 대한 도덕적 파산 선고였다. 모리타니는 1960년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한 아프리카의 이슬람 공화국이다.

그가 블로그에 쓴 후속 게시물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을 보는 서구의 이중 잣대를 비판한 통찰은 더 절절하다. 일부 대목을 보자.

“서구는 그 가치를 자신들의 지리적 영토 밖에서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들의 양심이 폭력의 표적이 되지 않는 한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현대사를 통해 분명히 보여준다. 그들은 문화적 의미에서만 서구인이다. 내가 보기에 (근대) 서양문명은 가장 훌륭한 문명 중 하나이다. 그것으로 인간의 정신은 성숙함의 단계에 이르렀고, 그 틀 안에서 영원한 인간의 가치가 형성됐다고 믿었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는 내 인식이 소외에서 조금씩 해방됐고, 나의 정체성과 실존을 되찾기 시작했다. 내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전쟁이 새삼 일깨운 아클리브 교수의 자각은 서양철학, 나아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확산한 근대 이후 서구 문명에 배신당했다는 고백으로 읽힌다. 격해진 감정이 다소 과장되고 단정적인 표현을 낳았을까? 이런 추정조차 제삼자의 ‘이성적 관찰’로 포장된 ‘자의적 억측’은 아닐까? 아클리브의 ‘전향’ 선언은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헤르초그 대통령이 하마스와의 전쟁을 ‘문명 충돌’에 빗댄 것과도 극명하게 대조된다. 12월5일 헤르초그는 미국 <엠에스엔비시>(MSNBC)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서 “이 전쟁은 단순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아니다. 이건 정말로, 진실로, 서구 문명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이란을 모방해 (이슬람권 각지로) 분열된 ‘악의 제국’의 공격을 받고 있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유럽이 그다음일 거고, 미국이 그다음 차례”라고도 했다.

민간인 희생에도 계속되는 미국의 지원

아랍인들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무조건 두둔해온 맹방인 것을 알면서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에 제동을 걸고 사태를 진정시켜주기를 바랐다. 그런 기대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허망했다. 개전 닷새 만에 이스라엘을 찾은 미국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기자들에게 “하마스의 학살은 이스라엘 유대인뿐 아니라 (세계) 모든 곳의 유대인에게 저지른 것이다. 나는 미국 국무장관으로서뿐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에 왔다”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블링컨 장관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우리 민주주의는 어려울 때도 다른 기준을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 책임짐으로써 테러리스트와 차별화된다. 민간인 피해가 없도록 가능한 모든 예방 조처를 하는 게 매우 중요한 이유이자, 우리가 모든 종교와 모든 국적의 무고한 민간인 희생을 애도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2023년 10월28일 이스라엘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그러나 미국이 이스라엘의 민간인 살상에 지속해서 우려를 표하고 자제를 요구한 건 빈말에 그쳤다. 12월12일 유엔 총회는 가자지구에서 “즉각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채택했다. 10월27일에 이어 두 번째였다. 두 차례 모두 미국은 ‘반대’표를, 한국은  처음엔 ‘기권’했으나 두 번째 표결에선 찬성표를 던졌다. 12월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휴전 촉구 결의안도 15개 이사국 중 13개국이 찬성했지만, 상임이사국인 미국의 반대(거부권 행사)와 영국의 기권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전쟁범죄 조사는커녕 비난도 아닌 ‘휴전 촉구’조차 가로막혔다.

12월18일 이스라엘에 간 미국의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미국은 이스라엘에 필요한 무기와 전술 차량, 방공 시스템 등을 계속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틴 장관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보호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이자 전략적 명령”이라고 강조하면서도 “내가 이스라엘을 방문한 것은 (전쟁) 일정이나 조건을 정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고 했다. 한 손에 민간인 희생 옐로카드를 들고, 다른 손으론 전쟁 지속 면허장을 내준 꼴이다.

미국의 군사용어에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게 있다. 1960년대에 나온 이 개념은 ‘군사작전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한 민간인 살상과 그 밖의 피해’를 뜻한다. 군대의 잘못에 대한 법적·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완곡어법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부수적 피해’는 막을 수 있었는데도 외면한 결과이거나 ‘미필적 고의’ 혐의조차 짙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참상과 인도주의 위기는 그 생생한 사례다. 가자지구는 좁은 땅에 230만 명이 밀집한데다, 14살 이하 미성년자가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한다. ‘하늘만 열린 감옥’에 유폐된 선주민들에게 무차별 공습과 포격을 퍼부으면서 민간인 보호를 강조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전쟁 발발 75일째인 12월20일 가자지구의 누적 사망자는 2만 명에 육박한다. 사망자의 약 70%가 여성·어린이·노인이다.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 방식이 민간인 살상도 묵인하는 전쟁범죄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이스라엘 여성으로는 최초의 전쟁 사진 저널리스트이자 인권·평화 운동가인 아나트 사라구스티는 “이스라엘의 주류 언론이 가자 지구의 실상을 거의 보여주지 않고 끔찍한 상황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며 “이는 이스라엘 언론인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2023년 12월 13일 이스라엘 일간 <하아레츠>의 팟캐스트 방송에서다. 그는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이스라엘 시청자들은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도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잔학 행위, 무너진 건물 잔해, 파괴, 인도주의적 위기를 전혀 접하지 못한다. 그런 걸 보여줘야 한다.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사라구스티는 현재 텔아비브에서 ‘현지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는 전쟁사진전의 큐레이터다.

‘공존’ 약속한 오슬로협정, 사실상 좌초

2023년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공존에 합의한 오슬로협정이 체결된 지 꼭 30년이 된 해였다. 1993년 미국이 중재한 오슬로협정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국가 창설을 돕고 팔레스타인은 무장투쟁을 포기한다는 ‘두 국가 해법’을 실현해간다는 게 뼈대다. 이 협정에 서명한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대통령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은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러나 오슬로협정의 평화 프로세스는 시작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 극단주의 집단의 반발로 암초에 부닥쳤고, 지금은 사실상 좌초된 상태다. 1995년 라빈 총리가 재임 중 극우 시오니스트의 총에 암살됐다. 1996년에는 강경 시오니스트인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집권했다. 네타냐후는 2000년대의 첫 8년을 빼고는 지금까지 줄곧 총리직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의 장기 집권은 팔레스타인 평화 프로세스의 파탄과 궤를 같이한다.

12월16일 네타냐후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거의 30년 동안 내가 오슬로협정에 제동을 걸고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방해한 건 사실이며, 그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오슬로협정을 “끔찍한 실수”로 규정하고, “우리는 가자지구에서 ‘작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보고 있으며, 우리가 국제적 압박에 굴복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가 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15년에도 자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당신이 총리로 재임하는 한 팔레스타인 국가가 탄생할 가능성은 전혀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정말 그렇다”고 못박았다.

12월20일 이스라엘 라이히만대학 로스쿨의 이샤이 베르 교수는 현지 일간 <하아레츠>에 실은 기고에서 “이스라엘 지도부의 ‘초토화’ 주창자들이 이스라엘군을 더럽히고 위험에 빠뜨린다”고 지적했다. “우리 중에는 정당방위 전쟁 말고도 종교전쟁과 보복전이라는 두 가지 다른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불행히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작전 목표에 관한 발언은 이 세 가지 전쟁과 모두 관련이 있다.”

전쟁은 일단 벌어지면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 극단적 폭력과 광기로 치닫기 십상이다. 특히 20세기 전반의 양차 세계대전은 전례 없는 대규모 파괴의 살육 극한을 보여줬다. 그 최대 피해자 중 하나가 유대인이었다. 인류는 기술문명의 가공할 파괴력과 인간의 악마적 속성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0월24일, 국제사회는 “우리 일생 중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 대한 반성과 인간의 존엄과 평등, 인류의 평화와 공동번영에 대한 염원을 모아 유엔(UN·국제연합)을 결성했다. 이스라엘은 1947년 11월 유엔 총회 결의안에 근거해 1948년 5월 탄생한 나라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과 분쟁을 평화와 공존으로 바꾸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도 이성적인 대안이 바로 오슬로협정으로 합의한 ‘두 국가 해법’이다. 물론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즉각 휴전이다. 그 뒤엔 네타냐후 집권 20여 년 새 휴지 조각이 돼버린 오슬로협정과 평화 프로세스를 되살려야 한다.

인권·평화 등 강조해온 서구가 증명 책임 있어

아클리브 교수는 소셜미디어의 후속 글에서 “처음으로 서구 문명을 비판하고 제한해 지리적·문화적 경계 안으로 되돌리려 했던 사람은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같은 서구 철학자들이었다”고 짚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최악의 폭력 사태를 낳은 당사자들이다. 미국은 오슬로협정을 중재해놓고도 이스라엘을 맹목적으로 지지함으로써 평화 프로세스의 실현에는 어깃장을 놨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이유로, 유엔 헌장이 다짐한 인권과 존엄, 평등과 평화, 나아가 인간 이성과 분별력의 힘이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할 책무와 능력도 그 나라들이 누구보다 무겁게 지고 있다.

조일준 <한겨레> 토요판 선임기자 iljun@hani.co.kr

*호모 미그란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안들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 지식, 그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를 4주에 한 차례씩 연재합니다. 호모 미그란스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하는 인간’을 뜻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