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 지휘 스승’ 진솔 “열정적인 수업 태도에 오십견도 찾아와” [인터뷰] [5% 마에스트라의 세계]
드라마 통해 문화적 인식의 변화 기대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첫 수업부터 너무나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빛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하세요. 그게 참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2022년 12월, 배우 이영애와 젊은 여성 지휘자 진솔(36)이 처음 만났다. 국내 최초로 여성 지휘자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마에스트라’(tvN)를 위해 진솔이 투입됐다. 일 년 만에 이영애를 ‘세계적인 지휘자’로 만들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서다.
길다면 길다 할 수 있겠지만, ‘음악계의 시계’로 보면 분명 짧은 시간이다. 36세에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현 파리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세계적인 거장 정명훈은 “60살이 넘어서야 지휘자라고 불러도 창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휘 ‘완전 정복’은 불가능한 꿈처럼 보였지만, 시간은 흘렀고 뚜껑은 열렸다. 음악계 관계자들은 이영애의 지휘를 두고 ‘격정적인 우아함, 드라마틱한 강렬함’을 품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지휘 스승이었던 진솔의 지휘와 상당히 닮았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서울 용산구 헤럴드경제 사옥에서 만난 진솔은 “1년의 지휘 수업 동안 이영애 배우는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에 굉장히 즐거움을 느끼는 학생이었다”며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지휘 실력이 느는 모습을 보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드라마 ‘마에스트라’는 지휘자가 주인공이면서도 지휘를 외면했던 그간의 영화, 드라마와 달랐다. 전 세계 지휘 콘텐츠 사상 가장 많은 ‘지휘 동작’을 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진솔과 이영애의 만남은 천재 지휘자의 탄생을 위한 ‘장기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아무리 음악을 좋아해도 지휘에 대한 편견이 있더라고요. 사람들에게 지휘는 그저 손을 휘젓는 것처럼 보이나봐요. 알고 보면 정확한 패턴에 따라, 악기별로 사인을 주고 받으며, 호흡을 가져가야 하죠. 그래서 완벽한 지휘자처럼 보이는 것을 단기간에 습득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에요.”
대다수의 영화, 드라마에서 ‘지휘 장면’을 아끼고, 연기에 집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마에스트라’는 지휘와 ‘정면 승부’했다. 진솔은 “직접 지휘해야 하는 교향악만 해도 베토벤, 슈만, 브람스 등 총 7개에 달했다”고 말했다.
수업은 ‘지휘의 개념’부터 시작됐다. 이영애는 일 년 동안 ‘열정적 모범생’으로 수업에 임했다. 진솔은 “배우들은 드라마 한 편을 찍어도 전문가로 변신해야 하다 보니 엄청난 노력을 한다”며 “(이영애는) 거장 지휘자들의 영상을 다 찾아보고, 클래식 음악을 섭렵했으며, 피상적 접근이 아니라 깊이 알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영애는 번스타인이 지휘한 흑백 영상을 찾아본 뒤 “이 부분에서 왜 이렇게 지휘를 하는 거냐”, “지금 뭐라고 지시한 거냐”고 물어보며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지휘의 A부터 Z까지 배우는 과정은 쉽지 않았기에, 진솔이 각각의 곡들을 지휘하면 이영애가 해당 동작을 익히는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어갔다. 진솔은 “앞에서 연주하며 지휘동작을 보여주긴 했으나, 대부분의 동작이 배우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든 것”이라며 “여러 개의 패턴을 보여준 뒤, 논의를 거쳐 결정했다”고 말했다.
지휘 동작엔 ‘드라마적 장치’도 개입됐다. 화면으로 볼 때 작은 동작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하고 되도록 큰 동작으로 지휘를 구성했다. 진솔은 “‘무대는 전쟁터’라는 차세음의 대사처럼 포디움이 단지 아름다운 곳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강인하고 센 모습도 지휘에 담았다”고 말했다. 동작 뿐만 아니라 차세음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평상시 말투나 표정 등도 함께 고민했다.
일 년간의 열정적인 지휘 수업 결과 배우에게도 지휘자의 직업병이 찾아왔다.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격정적인 동작에 이영애도 어깨 통증에 시달렸다. 진솔은 “이영애 배우가 재밌어 하면서도 이렇게 아픈게 맞냐며 놀라워했다. 잘 듣는 약을 추천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 참여한 것은 진솔에게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사촌오빠인 배우 이준기는 동생이 낯섦에서 오는 어려움을 토로하면 “나 때는 말이야~”라며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응원해줬다고 한다.
“지휘할 땐 어떤 점이 불편해요? 이렇게 말하면 어색한가요? 지휘자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요? 지휘자는 어떤 삶을 살아요? 뭘 공부해요?”
‘질문왕’ 이영애가 던지는 질문은 다양하고 방대했다. 그는 지휘자 진솔이 걸어온 모든 길을 알고자 했고, 진솔의 삶을 흡수해 차세음을 만들었다.
사실 음악계에서 진솔의 위치는 독특하다. 1987년생으로 이름에 ‘계이름’이 들어간 그는 ‘트렌디한 감각’을 가진 젊은 지휘자의 대명사다. “게임이 좋아, 게임에 나오는 음악을 다 외우다 보니” 정통 클래식은 기본, 게임 음악 장르까지 개척했다. 게임 마니아들을 클래식 공연장으로 끌어모으는 인기 콘텐츠인 ‘스타 크래프트’, ‘리그오브레전드’, ‘시드 마이어의 문명’, ‘라그나로크’ 등의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독보적인 음악가다. 그러면서 대구국제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 한국예술영재교육원(한예종 영재원) 오케스트라 지휘자, 플래직 대표이사 겸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모험적인 마인드가 꽤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진솔에게 삶의 방향키를 바꾸도록 한 사람은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였다. 그가 지휘하는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의 연주 영상을 본 뒤 그는 지휘자를 꿈꾸게 됐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평생을 살아온 부모님은 외동딸이 지휘자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진솔은 “정통 클래식을 하셨던 만큼 여성 지휘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지 아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작곡가 진규영, 어머니는 성악가 이병렬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합창 지휘를 공부한 그는 이후 독일 만하임 국립음대에서 석사를 밟았다. 2013년 만하임 음대로 유학갔을 당시만 해도 지휘과에 입학한 동양인 여학생은 진솔이 처음이었다. 진솔이 공부한 환경 역시 ‘보수적’이었다. 그는 “20대 초반에 여성 지휘자의 공연을 보러간 적이 있는데, 당시 아버지 또래의 어르신이 (공연장에서) 나오며, ‘무슨 여자가 지휘냐’고 말씀하시더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프로 지휘자로 첫 발을 디딜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20대 초반 한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지원했을 때다. 서류까지 붙었지만, 악단에선 한 번도 여성에게 지휘를 맡겨본 적이 없다며 청소년 단원들의 어머니들이 리허설을 평가했다.
그는 “당시엔 억울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했지만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잘 해냈다”며 “지금은 시대 변화가 빨라 10년 새 여성 지휘자를 꿈꾸는 학생들도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진솔이 수업 중인 한예종 영재원에서도 ‘미래의 마에스트라’를 꿈꾸는 새싹들이 많다. 그는 “지금의 아이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필터를 씌우고 보지 않더라”며 “굉장히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진솔에게 ‘마에스트라’가 각별한 것은 이 드라마가 더 큰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 각지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K-드라마의 힘이 ‘문화 전도사’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설렘과 기대도 있다.
“만하임 음대에서 조교를 할 때 베트남 국가 장학생 1호인 친구가 저만 보면, ‘대장금’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베트남도 달라지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 지휘자는 상상할 수 없대요. ‘대장금’에 나온 유명한 배우가 이번엔 여성 지휘자를 연기한다고 하면 문화적 영향력이 상당할 거라고 생각해요. 이영애 배우에게 많은 소녀 지휘자들에게 꿈이 돼달라고 항상 이야기해요. 전 할 수 없지만, ‘마에스트라’는 할 수 있으니까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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