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만 높다란 30cm 높이의 포디움…이젠 여성 지휘자가 ‘새로운 트렌드’ [5% 마에스트라의 세계]
현재의 여성 지휘자 약진은 세계적 현상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전 세계에 여성 지휘자가 5% 밖에 안되는데, 차세음은 남녀 통틀어 톱5에 들잖아.” (tvN 드라마 ‘마에스트라’ 대사 중)
2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세계적인 여성 지휘자 차세음(이영애 분). 성별을 넘어 세계를 제패한 지휘자를 주인공 삼았으나, 드라마에선 ‘여성’ 지휘자로의 삶에 초점을 두진 않는다. 다만 여성 지휘자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한 줄의 대사가 드라마 첫 회에 등장한다.
음악계 관계자들은 “실제 통계가 없어 전 세계 여성 지휘자가 5% 정도에 그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금은 그보다는 많을 수도 있다”면서도 “다만 현재의 흐름과 달리 역사를 돌아보면 충분히 그럴 법 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지휘’는 오랫동안 ‘금녀의 영역’이었다. 고작 30㎝ 밖에 되지 않은 포디움(지휘대)은 여성들에겐 굳건한 ‘유리천장’이었다.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 배우 이영애의 ‘지휘 스승’이었던 진솔(36)은 “이 드라마는 너무나 혁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의 틀을 깬 여성 지휘자의 이야기가 안방극장의 메인 시간대에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 할만 하다”고 말했다.
포디움에 첫 발을 내디딘 여성은 영국 출신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메리 웜. 그는 1887년 베를린 필하모닉을 처음 지휘한 이후,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문화를 깨고 ‘최초’의 아이콘이 됐다.
지금의 흐름은 또 다르다. 21세기에 가장 주목해야 할 음악계의 변화 중 하나가 여성 지휘자의 등장과 약진이다.
2019년 개봉한 영화 ‘더 컨덕터’의 주인공이기도 한 안토니아 브리코는 여성 차별이 만연한 1930년대의 문을 열었다.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1930)과 뉴욕(1938)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뉴욕필을 지휘한 여성은 브리코가 처음이다.
브리코가 활약하던 시대는 보수적이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등장하는 자막은 2000년대까지 이어진 굳건한 남성 중심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안토니아는 평생을 음악에 바쳤고 유명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활약했다. 그럼에도 상임 수석 지휘자는 된 적이 없다. 2008년, 유명 평론지 ‘그라모폰’에서 세계 20대 교향악단을 뽑았는데 여성 수석 지휘자가 있는 악단은 하나도 없었다”는 자막이다.
이후 달라진 것은 마린 알솝, 시몬 영이 등장하면서다.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우승 연주를 지휘한 마린 알솝은 미국 메이저 교향악단 중 하나인 볼티모어(2007~)와 상파울루 심포니 오케스트라(2012~)를 지휘한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이다. 시몬 영은 2005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첫 여성 지휘자다. 2005~2015년 함부르크 주립 오페라단과 함부르크 주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이끌었다.
현재 여성 지휘자들의 활약은 세계적인 흐름이 됐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 중인 지휘자 성시연(48)은 “그동안 수많은 여성 지휘자들이 한 땀 한 땀 쌓아올린 성과와 더불어 여성의 발언권과 포지션에 대한 요구가 커지며 여성 지휘자의 등용 움직임이 몇 년 전부터 늘고 있다”며 “다양성의 논의와 함께 여성 지휘자의 채용도 음악계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국내 여성 지휘자의 숫자만 해도 꾸준히 늘고 있다. 성시연을 비롯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의 96년 역사상 첫 음악감독 김은선(43), ‘첼로 신동’ 장한나(41) 등이 주목받는 국내 여성 지휘자들이다.
성시연은 2006년 게오르그 숄티 국제 지휘 콩쿠르 우승, 2007년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수상하며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알렸다. 2014년 국내 국공립 오케스트라 사상 첫 여성 예술단장으로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부임해 4년 간 이끌었다. 현재 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수석 객원지휘자를 맡고 있다. 장한나는 카타르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거쳐, 2017년부터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은선의 경우 미국, 유럽에서 활동하며 백인 남성 위주의 클래식 무대에서 동양인이면서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썼다. 그는 2008년 5월 지저스 로페즈 코보스 국제오페라지휘자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데뷔, 같은 해 9월 스페인왕립극장 부지휘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3년엔 영국 국립오페라단(ENO)에 데뷔, 115년 전통의 ENO에서 지휘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진솔 역시 자신만의 영역을 닦으며 국내외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진솔은 “여성 지휘자의 등용이 하나의 유행처럼 서구 무대를 중심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흐름이 분명히 있다”며 “그러한 트렌드를 잘 잡아 여성 지휘자의 활동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시연 역시 “지금은 각 대학마다 지휘를 전공하는 여학생들의 비율도 늘었고, ‘잘 하는 지휘자는 다 여자’라는 우스갯소리도 한다”며 “트렌드는 언젠가는 사라진다. 하지만 그 때가 되면 여성 남성의 구분 없이 여성 지휘자를 ‘지휘자’로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시대가 되리라 본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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