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먹고파” 목숨 걸고 탈북한 9세 소년, 스타트업 청년 대표 되다[정양환의 요즘 (젊은) 것들]
짧은 글귀지만, 한반도에서 이 문장이 갖는 함의는 적지 않다. 요즘 많이 줄었다지만, 흔히 탈북민이라 부르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에 온 탈북민은 약 3만4000명(지난해 기준). 저마다 국경을 건넌 이유는 다르겠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찾아 그들은 목숨을 걸었다.
그 중엔 미성년자도 5100명 정도가 포함돼있다. 특히 0~9세일 때 탈출한 어린이는 약 1300명. 아마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왔을 공산이 크지만, 세월은 그들을 자연스레 북쪽 기억보단 남쪽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남한에서 나고 자란 여느 동년배와 다름없이.
9살에 탈북한 김여명 씨(28)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당연히 북한 억양을 쓰지만, 그는 이제 “친구들 경상도 사투리를 따라 하는 게 훨씬 쉬울” 정도다. 탈북 직전 다니던 게 소학교였는지 인민학교였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 하지만 북을 떠난 지 20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남한 사람’인 동시에 ‘북한 사람’이다.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네 청년이면서도 이방인의 정서를 가슴 깊이 간직한 여명 씨를 만나봤다.
-본인 소개를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김여명이라고 합니다. 1995년생이니까 올해 스물여덟입니다. 아홉 살에 할머니 부모님 동생과 북한에서 탈출해서, 같은 해 남한으로 왔습니다. 한양대 기계공학과 졸업하고, 지금은 스타트업 ‘포 레거시’에서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대표라니까 되게 거창한데, 2명이 시작해서 최근 4명으로 늘어난 올해 창업한 회사예요. 아직 수익은 제로입니다, 하하.”
-스타트업 창업한 20대 청년. 왠지 근사한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지만, 아직 갈 길이 먼 초짜일 뿐이죠. 저희야 확신을 가지고 도전하지만, 미래가 어떨지도 모르고요. 실제로 제가 스타트업이 이번이 3번째인데, 그 전에 성공했으면 여기 있질 않겠죠?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부침을 겪은 터라, 현실은 정말 만만치 않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어요.”
“그럼요. 저희 가족이 남포에 살았는데, 항구 도시다 보니까 친구들이랑 낚시 다니던 기억이 많이 나요. 폐공장 같은 데서 벽돌이나 철근 같은 걸 주워 오기도 했고. 뭣보다 그땐 항상 배가 고팠어요. 하루에 1끼밖에 못 먹으니까. 배급받아온 쌀을 죽보다 희멀겋게 끓여서 가족이 나눠 먹곤 했어요. 그러니 남는 시간엔 애들이랑 산으로 바다로 먹을 걸 찾아다녔죠.”
-벽돌은 왜 주우러 다녔어요.
“학교에서 시켰어요. 남한에서 준비물이라 하면 필기도구나 그런 거지만, 북한에선 언제나 그런 자재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어디다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온종일 ‘구루마’ 끌고 다니다 어두워지곤 했어요.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업에 못 들어가고 벌칙으로 노동 작업을 해야 했어요. 등교해서 온종일 물만 길어 나르다 집에 간 적도 있어요.”
-초등학교 1학년인데 그런 걸 시키나요.
“남한에서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땐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못 했어요. 다들 하는 거니까…. 그 나이에 그런 체제가 좋은지 나쁜지도 몰랐고요. 누구 생가 같은 데 억지로 가는 게 싫긴 했는데, 그냥 답답하다는 느낌 정도였어요. 아버지 어머니한테 탈북할 거란 말을 들었을 때도, 그게 얼마나 큰일인지 몰랐어요. 그냥 중국으로 간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죠.”
-두만강을 맨몸으로 건널 때 무섭지 않았나요.
“그걸 판단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어요. 겨울이라 물이 허리 정도 찼는데, 가족이 다 같이 가니까 별로 겁나지도 않았고. 아마 부모님께선 자식 목숨까지 걸린 일이라 힘드셨겠지만, 전 부사(사과 품종) 먹을 생각에…. 아, 그 전에 할머니 친척이 중국에서 부사를 한번 사다 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중국 간다니까 그게 떠올라서 ‘부사 또 먹을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실컷 먹을 수 있다기에 그 생각밖에 없었어요, 하하.”
“말수가 적으신 편이라 자세히 설명하진 않으셨는데…. 저랑 제 동생 미래에 대한 걱정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공부를 잘하셔서 의대에 가고 싶었는데, 출신성분이 낮아 결국 포기했대요. 자식들도 하루 한 끼 희멀건 죽밖에 못 먹는 삶을 대물림하는 게 싫었답니다. 운 좋게 탈북 브로커랑 이어져서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신 거죠.”
-중국에서 부사는 실컷 먹었나요.
“많이 먹었어요, 하하. 근데 그보다 콜라를 처음 마셨는데, 진짜 세상에 그런 게 있을 줄은…. 중국에서 한동안 숨어 지내다 몽골로 건너가는데, 품에 꼭 안고 다녔어요. 이거면 된다고. 아, 스크램블도 기억나네요. 달걀을 한 번에 서너 개씩 먹어본 게 처음이었거든요. 부모님은 내내 불안하셨겠지만, 전 신세계가 펼쳐진 듯 신났어요.”
-왜 몽골로 간 거예요.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게 남한으로 가는 루트였어요. 몽골에 가서 난민 신분으로 대한민국대사관의 도움을 얻는 거죠. 근데 탈북보다 몽골 가는 게 더 위험하대요. 중국 택시를 타고 국경선에 가서 철조망을 건너야 하는데, 어리숙한 운전기사가 잘 못 내려주면 러시아로 넘어가거든요. 그럼 현장에서 총살되거나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운 없는 경우가 많아요. 저흰 다행히 몽골로 가서 남한까지 오게 된 거죠.”
-남한에 와도 바로 정착하는 건 아닌 거죠.
“네, 대성공사에서 조사받고 안성에 있는 하나원에서 반년 이상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기간이 좀 헷갈리긴 하는데, 하나원에 있으면서 근처 초등학교도 잠깐 다녔으니까 꽤 오래 있었어요. 하나원에도 여러 교육·놀이 프로그램이 있지만, 계속 같은 곳만 있으니깐 답답하던 차라 학교에 간다니까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
-초등학교에 가니까 어땠나요.
“진짜 어색했죠. 일단 말투가 다르니까…. 제가 말만 꺼내면 애들이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그나마 담임선생님이 반장한테 잘 챙겨주라고 부탁하셔서, 그 친구가 굉장히 잘 해줬어요. 근데 뭐 수업을 해도 애들이랑 대화해도 알아듣는 게 없으니까. 무슨 만화 게임 얘기를 하는데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래서 쉴 때는 운동장 구석에서 혼자 앉아 있곤 했어요. 숨통이 탁 트여서 너무 좋았던 게 떠올라요.”
“네, 특히 북한이랑 남한이 그렇게 사이가 나쁜 줄 몰랐거든요. 그때 ‘빨갱이’니 ‘무장공비’니 하는 말도 처음 들었고…. 하나원 나온 뒤론 서울 영등포에 있는 임대아파트로 이사 와서 정착했는데요. 친구들이랑 좀만 친해지나 싶으면, 다음날 와서는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라고 했어요. 저란 존재가 교육 차원에서 뭔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무장공비란 말도 걔들이 어디서 듣고 어떻게 알았겠어요.”
-반 친구가 면전에서 무장공비라 했단 말입니까.
“네…. 그 친구하고는 시비가 잦아져서 결국 크게 싸웠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학교 뒷산에서 단둘이 치고받았죠. 요즘 분위기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근데 재밌는 건, 걔가 지금도 자주 보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예요. 한번 시원하게 뒹굴고, 서로 뭔가 통하게 된 거죠. 그 이후론 그 얘길 꺼내지도 않지만, 뭐 친구 사이가 원래 다 그런 거잖아요.”
-그래도 마음에 상처가 됐겠네요.
“그렇긴 한데, 전 그걸 제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남한에 와서 너무 좋았거든요. 일단 삼시세끼 먹을 수 있는 거 자체만으로 행복했어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싶었죠. 말투부터 바꿨어요. 북한말 안 쓰려고 노력하고, 반에서도 뭐든 나서서 했어요. 수업도 열심히 듣고, 청소 포함 모든 일에 무조건 손들었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저를 대하는 게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이듬해 3학년엔 반장도 하게 됐죠.”
-대단하네요. 한편 안쓰럽기도 하고요. 아직 어린데,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니.
“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북한에선 그보다 훨씬 노동 강도가 셌잖아요. 그런데도 벽돌 모자란다고 혼났죠. 근데 여기선 조금만 부지런해도 칭찬받고 애들도 달리 보는데, 보상이 확실하니 더 열심히 했죠. 게다가 선생님들이 정말 잘해주셨어요. 주말에도 저 데리고 가서 맛있는 거 사주시고, 공부도 가르쳐주시고. 6학년 때까지 모든 선생님이 다 그러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들도 쉬고 싶으셨을 텐데, 개인 시간까지 할애해서 챙겨주신 거잖아요. 너무 감사할 일이죠.”
“밥 굶지 않으니 북한 때보다야 훨씬 낫죠. 근데 풍족하지도 않죠. 3학년 때인지 4학년 때인지 헷갈리는데,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어머님께서 삼겹살을 구워주셨거든요. 전 그때까지 집에서도 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해봤어요. 아버지는 남한에 오셔서 대학 박사학위를 따셨어요. 한 10년 걸렸는데, 그러니 그때까지 지원금 조금이랑 어머니가 일하시는 게 경제적 수입의 전부였죠.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당연한 듯 가는 학원을 저희 집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어요.”
-그럼 학원을 다닌 적이 없나요.
“원래 그럴 상황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도 그랬지만 남한에 와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같은 동네에 제 처지를 알고 공부를 가르쳐주신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그분 소개로 목동에 있는 학원 원장님을 알게 돼서 무료로 학원을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비용이 적지 않을 텐데 너무 감사한 일이죠.”
-그 덕에 대학도 잘 갔나 보네요.
“큰 도움이 됐죠. 근데 내신은 그리 좋진 않았어요. 수학 과학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다른 과목은…. 고등학교 때 과학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아요. 양천고등학교 나왔는데, 학교 최초로 청소년과학축전도 참가했거든요. 온실 자동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꽤 반응이 좋았어요. 북한 있을 때부터 뭔가 만드는 걸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무조건 기계공학과가 목표였어요. 돌이켜보면, 그게 다 주변에서 도와준 분들이 많았던 덕분이죠.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분야를 한 우물만 팠던 것도 주효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좋아하셨겠네요. 자식 위해 탈북하셨잖아요.
“네, 그러셨을 텐데 아버지는 내색을 많이 하시는 편은 아니에요. 어머니는 그래도 기쁜 티를 좀 내셨는데. 지금도 자식들이 뭘 하겠다고 하면 묵묵히 믿고 지켜봐 주시는 편이에요. 그래서 항상 고맙고, 제가 더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겨요. 빨리 돈 벌어서 집안에 도움이 되고 싶었고요. 기계공학과 목표로 공부할 때부터 항상 창업을 염두에 뒀던 이유 중 하나가, 빨리 성공해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돕고 싶었어요. 고생한 가족도, 절 도와준 남한 분들도 제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길 바라시는 거라고 믿거든요.”
※다음 주 토요일(12월 31일)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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