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치료제 "인류 구할 혁신신약" vs "과열에 부작용 우려" [비만약 광풍의 명암]

이재명 2023. 12. 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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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P-1 계열 약 게임체인저로 자리잡아
사용량 급증하며 오남용 우려 현실로
우후죽순 후발주자 기술 차별화 안간힘
"의료비용 절감, 신약 투자로 이어져야"
편집자주
글로벌 제약사들이 잇따라 내놓은 비만 치료제가 제약·바이오 시장의 메가 트렌드로 떠올랐다. 만병의 근원인 비만을 잡아 의료 비용을 낮추는 긍정적 영향이 기대되지만, 신약개발 왜곡이란 부정적 측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일보는 소비자도 개발사도 과열되고 있는 비만 약 열풍을 차분하게 진단하는 기획기사를 보도한다.
호주에서 비만 치료제를 쓴 뒤 사망한 트리시 웹스터(아래)와 그의 남편. '60 Minutes Australia' 유튜브 채널 캡처

호주에 사는 트리시 웹스터(56)는 딸의 결혼식 때 드레스를 입기 위해 살을 빼기로 했다. 고에서 본 비만 치료제를 처방받아 5개월 주사했더니 16㎏이 줄었다. 하지만 그는 딸의 결혼식도 못 본 채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은 급성 위장병. 가족들은 비만 치료제를 의심하고 있다.

웹스터가 쓴 비만 치료제의 주성분은 '세마글루타이드'다. 글로벌 제약사들 비만 약이 대부분 비슷한 성분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최근 1년간 호주 독극물 정보센터에 이 성분의 제품과 관련한 신고가 120건 접수됐다고 지난달 보도했다. 비만 약을 원격진료로 처방받고 온라인으로 쉽게 배송받는 호주에서 먼저 오남용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①곳곳에 품절 사태... 진짜 수요는 얼마나

세마글루타이드는 식욕을 억제하는 장 호르몬인 GLP-1과 구조가 비슷하게 합성한 물질이다. GLP-1은 금방 분해돼 사라지는데, 세마글루타이드는 몸에 남는다. 유명인들이 비만 약으로 체중 감량에 성공한 게 알려지면서 GLP-1 계열 약은 '부자들의 약', '구하기 힘든 약'으로 입지가 확고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적인 비만 약 품귀 현상과 성장 기대감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사재기급 수요 급증 탓"이라며 "치료 목적보다 미용을 위한 사치품으로 여기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실제 의료적 수요는 가늠이 어렵다"고 귀띔했다.

국내에서도 비만 약은 미용 목적으로 주로 쓰인다. 체질량지수(BMI) 30㎏/㎡ 이상이 처방 요건이지만, 정상 체중인 사람도 다이어트에 쓰곤 한다. 헬스케어 정보기업 아이큐비아가 국내에 들어온 유일한 GLP-1 계열 비만 약인 '삭센다'의 올 1분기 처방을 분석한 결과, 전문의가 아닌 일반의 처방이 47.7%였다.

글로벌 제약사 노보노디스크가 개발한 비만 치료제 '위고비'. 로이터=연합뉴스

바이오 벤처캐피털 데일리파트너스의 이승호 대표는 "환자 수와 처방 질환이 정해져 있는 항암제와 달리 비만은 '해피 드럭'이기 때문에 마케팅 확장성이 무궁무진하다"며 "환자 규모는 웬만한 질환보다 거대한데 약가도 비싼 게 시장의 성장성을 높게 보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현재 대부분 국가에서 비만 약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러나 사용량이 많아질수록 부작용도 늘고 있다. 유럽의약품청(EMA)은 GLP-1 계열 약이 자살 충동을 일으키는지 재검토가 필요하다며 최근 개발사들에 추가 데이터 제출을 요구했다. 김효준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의학생명과학과 명예교수는 "GLP-1 계열 약은 뇌에 작용하는 호르몬제이기 때문에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오남용에 따른 메스꺼움, 위장 트러블, 정신질환에 더해 내성 문제까지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②너도나도 후발주자... '비만 백신'에 쏠린 눈

후발주자 로슈와 아스트라제네카, 화이자는 기업 인수합병이나 기술이전을 통해 GLP-1 계열 약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급해졌다. 최윤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단순한 복제약이 되지 않기 위해선 글로벌 브랜드와 경쟁할 마케팅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SK바이오사이언스가 특허를 출원한 '비만 백신'에 이목이 쏠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GLP-1과 다른, mRNA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공개된 특허 명세서에 따르면 해당 기술은 면역체계가 지방세포를 없애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지방세포를 면역체계로 공격하려면 항체가 형성돼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기술은 황열, 풍진, 대상포진 등 다른 백신을 접종한 사람에게 적용된다. 가령 풍진 백신을 맞아 풍진 바이러스에 대항할 수 있는 항체가 존재하는 경우, 풍진 바이러스의 단백질(항원)을 생성하는 mRNA를 지방세포가 많은 부위에 주입하는 것이다. 그러면 mRNA가 지방세포로 들어가 항원을 만들고, 항원이 달린 지방세포를 항체가 바이러스인 줄 알고 공격한다.

실험쥐에게 SK바이오사이언스의 비만 백신을 투여한 뒤 20일 동안 측정한 몸무게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 이 회사의 특허 명세서에는 몸무게와 지방 조직이 감소했다고 설명돼 있다. 키프리스 제공

면역체계가 비만을 억제하는 원리라 비만 백신으로 부르긴 하지만, 비만을 '예방'한다기보다 특정 부위의 지방을 분해하는 '치료' 용도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특허 명세서에서 실험쥐에게 비만 백신을 2일 간격으로 5회 투여한 결과, 투여하지 않은 쥐와 비교해 체중과 지방 조직이 감소하는 효과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외 쓰리에이치바이오, 뉴로바이오젠, 프로젠, 올릭스, 샤페론, 지놈앤컴퍼니 같은 국내 벤처들도 GLP-1과 원리가 다른 비만 약 개발에 착수했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③더 싸고, 더 편하게... 결국 가격·편의성 경쟁

작용 원리가 비슷하면 투여 편의성과 가격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벌써 가격 경쟁을 시작했다. '젭바운드'의 한 달 약값은 1,060달러로, '위고비'(1,350달러)보다 20% 저렴하게 책정됐다. 그러자 노보노디스크는 위고비로 효과를 못 보면 돈을 안 받겠다는 전략을 내놨다.

GLP-1 계열 비만 약은 모두 주사제다. 누가 먼저 먹는 약으로 바꾸느냐에 따라 시장 판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일주일마다 맞는 위고비나 젭바운드보다 투여 간격을 늘릴 수 있느냐도 관건이다. 결국 약효를 되도록 오래 지속시켜야 하는데, 펩트론과 인벤티지랩 같은 국내 기업들이 이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이봉용 넥스트젠바이오사이언스 대표는 "개선된 비만 치료제가 임상 성과를 보인다면, (글로벌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기술을 사가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글로벌 제약사 일라이릴리가 개발한 비만 치료제 '젭바운드'. 연합뉴스

④치료범위 넓은 캐시카우냐, 신약개발 왜곡 주범이냐

노보노디스크와 일라이릴리는 비만 약을 지방간, 심혈관질환, 알코올·흡연 중독, 치매 등에도 쓸 수 있게 하겠다는 계획이다. 세마글루타이드가 임상시험 3상에서 심혈관질환 부작용을 20% 감소시켰다는 보고가 있었고, 일부 알코올중독과 치매 환자에겐 벌써 쓰이고 있다. 비만이 만병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걸 감안하면 처방 대상 질환 확대가 자연스러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더 시급한 약, 수요가 적은 약 개발을 지연시켜 신약개발 산업이 왜곡될 우려도 제기된다. 최 선임연구원은 "비만 유행에 따르다 보면 희소질환 치료제나 항암제 개발에 장기 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코로나 백신·치료제를 개발하겠다며 투자자에게 혼란을 주고 바이오 산업의 신뢰를 떨어뜨린 전례가 있다. 일부 기업들이 비만도 코로나처럼 여기는 게 아닌지 조심스럽다"고 꼬집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유럽의약품청(EMA) 본부 전경. 연합뉴스

반면 많은 환자에게 쓰일 약을 개발하면 '캐시카우'를 확보할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도 적지 않다. 김흥열 한국생명공학원구원 센터장은 "비만으로 유발된 의료 비용을 절감해 다른 신약개발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도록 정책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이재명 기자 nowl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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