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 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한국인이 즐겨 듣는 캐럴에 숨은 역사
(시사저널=김영대 음악 평론가)
거리마다 울려 퍼지던 크리스마스 캐럴은 어느덧 어린 시절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아련한 옛 풍경이 된 것 같다. 음악 저작권료에 대한 부담 때문에 매장에서 캐럴을 마음껏 틀기 부담스러워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강화된 소음 규제 때문에 길을 걷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만큼의 음량으로 캐럴을 틀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추위가 매서운 12월 한 달을 포근하게 감싸던 크리스마스 시즌의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다. 있을 때는 잘 몰랐던 음악의 힘이란 게 그래서 새삼 더 와닿는다. 원래 크리마스 캐럴이란 구세주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기독교 음악들, 이를테면 성가나 찬송가의 레퍼토리를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즐겁고 낭만적인 대중음악 이미지가 강한데, 크리스마스가 원래는 중세 유럽에서 세속적이고 심지어 방탕한 유희에 가까웠다는 역사를 떠올리면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다.
크로스비의 싱글 음반, 5000만 장 팔려 나가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인들에게 가장 익숙하고도 널리 알려진 크리스마스 캐럴인 《White Christmas》만 해도 그렇다. 빙 크로스비의 유려하고도 낭만적인 목소리로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 역사상 최고의 히트곡인 이 곡은 여러모로 크리스마스라는 기독교 명절의 본질과는 큰 연관이 없는 곡이다. 예수도, 산타도, 심지어 루돌프도 나오지 않는 이 곡은 심지어 유대계 미국인 작곡가인 어빙 벌린의 작품이다. 벌린은 이 곡을 뮤지컬 영화인 《홀리데이 인》의 삽입곡으로 의뢰받아 작곡했는데, 정작 그가 이 곡을 쓴 곳은 추운 겨울이나 흰 눈과는 아무 상관없는, 따뜻한 태양이 작열하는 캘리포니아였다. '꿈속에 보는'이라는 가사도 아마 그래서 나오지 않았을까? 벌린은 이 곡이 자신이 쓴 최고의 곡일 뿐 아니라 역사상 최고의 곡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하는데, 이 곡이 크로스비의 싱글만으로 전 세계에서 5000만 장이 팔려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결국 그의 확신은 이유가 있었다.
이 곡을 비롯해 1940년대 미국에는 스탠더드 팝이나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일의 크리스마스 음악들이 대유행을 하게 된다. 이 히트곡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와는 무관한 유대인 작곡가들의 손에 의해 탄생한 것이 흥미로운데 이 곡이 기독교를 떠나 보편적인 명절이 된 크리스마스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는 클래식이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지 모르겠다. 참, 나이가 좀 있는 이들이라면 빙 크로스비의 버전만큼이나 컨트리 가수인 팻 분의 버전을 많이 기억할 듯하다.
'벽난로에는 노릇하게 익어가는 밤, 얼음요정은 내 코끝을 얼리고, 합창단이 부르는 캐럴과 에스키모처럼 입은 사람들'. 감미로운 재즈 크루너 냇 킹 콜의 곡으로 가장 유명한 《The Christmas Song》의 도입부 가사다. 아름답지만 노래가사에서 흔히 듣기 힘든 유니크한 단어 선택으로, 아무도 이게 노래가사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 곡은 《White Christmas》만큼, 아니 그 이상의 고전이 되었다. 평이한 제목 대신 노랫말인 'Chestnuts Roasting on an Open Fire 나 Merry Christmas to You'가 기억되는 이 곡 역시 유대계 미국인 작곡가들인 로버트 웰스와 멜 토메의 작품이다. 한여름에 더위를 잊기 위해 추운 겨울을 떠올리며 작곡했다고 하니 퍽 역설적인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냇 킹 콜의 모닥불처럼 따뜻한 목소리나 아름다운 멜로디도 일품이지만 크리스마스 캐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가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표현들이 눈에 띈다. 칠면조, 겨우살이, 갓난아이, 산타, 순록, 썰매, 그리고 선물. 온갖 아름답고 따뜻한 표현들이 멜로디를 타고 넘으며 결국 이 노래의 궁극의 메시지로 향한다. "내가 단순한 표현 하나를 전할게요. 한 살 먹은 애기부터 아흔두 살 먹은 애기들에게 모두 말이에요. 수없이 많이 말해져온 말이지만, 그대여, 메리 크리스마스." 냇 킹 콜은 이 곡에 애착이 많았고 무려 네 번이나 다른 버전으로 녹음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버전은 바로 1960년 발표된 네 번째 녹음으로 《The Magic of Christmas》라는 앨범에 담겨 있다.
캐럴을 내켜하지 않았던 머라이어 캐리
이제는 겨울마다 가장 많이 들리고 불려지는 크리스마스 캐럴, 바로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다. 그런데 이 곡에는 놀라운 반전이 세 개나 숨어있다. 첫째는 이 곡이 《White Christmas》처럼 오래된 고전이 아니라 1994년 발표된, 그러니까 우리가 부르는 유명한 캐럴 중에는 가장 최신곡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마치 1970년대 모타운 레퍼토리의 리메이크 같은 느낌을 주는 이 노래가 실제로는 머라이어 캐리 본인과 작곡가 월터 아파지나에프가 함께 만든 완전히 새로운 창작곡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노래는 발매되었던 1994년에는 정작 빌보드 HOT 100 차트에 입성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반전인데, 싱글로 따로 발매되지 않은 곡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당시 차트의 방침도 있었지만 이 노래가 당시만 해도 오늘날 같은 위상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노래는 이후 전 세계 모든 이에게 꾸준히 불리며 불멸의 클래식이 되었고 2000년 처음으로 싱글 차트에 이름을 올린 후 그 위세를 키워가더니 2019년부터 올해까지 무려 5년 동안 11월 마지막 주 차트의 1위 곡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대중음악 역사에서 그 누구도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상업적인 '단 한 곡'을 가진 적은 없었다.
머라이어 캐리가 이처럼 아름다운 '연금송'의 미래를 예견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당시 애인이었던 소니 뮤직의 토미 모톨라 사장이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앨범을 낼 것을 제안했지만 머라이어 캐리는 썩 내켜하지 않았는데, 당시 고작 스물다섯 살로 트렌디한 음악을 추구하던 그녀가 캐럴 앨범으로 인해 나이 든 이미지로 비춰질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이 프로젝트를 승낙한 머라이어 캐리는 프로듀서 월터 아파지나에프와 더불어 그녀가 듣고 자란 모타운 스타일의 캐럴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녹음하기로 결정했고 마치 모타운에 대한 오마주처럼 녹음된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는 크리스마스의 사랑스럽고 들뜬 분위기를 대표하는 영원한 클래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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