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는 표현 못할 고통…뭐라도 쓰니 살아지더만요”
어느 ‘조작간첩 피해 어부’의 글쓰기
1972년 모진 고문 당한 개야도 임봉택씨
아들 체포에 충격받고 목숨 끊은 아버지
무덤서 울고 온 날 출소 13년 만에 글쓰기
달달 외울 정도로 피해 사실 쓰고 또 쓰며
응어리 녹여 책 ‘거꾸로 매달아도…’ 펴내
지금도 새벽 5시에 일어나 읽고 쓰며 공부
“표현할 수 없다”가 수없이 반복되는 글들이었다. 표현할 수 없는 폭력을 당했고, 표현할 수 없이 몸과 마음을 다쳤지만,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표현하려 할수록 끝내 살게 하는 글쓰기가 그 작은 섬에서 계속됐다.
“환장하고 띠다 죽을 일”
죽어서도 “이즐(잊을) 수 없는 끔찍했던 사연들”이었다.
“형사 한 놈이 나가드(더)니 새(쇠)파이푸(프) 한발이 넘을 정도로 긴 것과 줄을 가지고 들어왔다. 나에게 쪼그리고 안즈(앉으)라는 것이다. 형사 놈들이 말해서 빨리빨리 행동하지 안(않)으면 사정없씨(이) 두둘(들)겨 패는 것이다.”
억울해서 “환장하고 띠(뛰)다 죽을 일”이었다.
“쪼그리고 안즌 두 무릅(릎) 사이로 새파이푸 끼고 양손을 파이푸 밑으로 내려서 손목을 꽁꽁 묵(묶)는 것이다. 그리(러)고는 파이푸 양 끗(끝)을 번쩍 들었다. 나는 어떠한 상태가 대(되)것는가. 나의 몸은 시골에 가면 돼지 발목을 묵어 근수를 달을(달) 때 형식이 됀(된) 것이다.”
숨차게 뛰던 글이 속도를 늦추며 말투를 바꿨다.
“고문밭(받)던 일을 생각하니까 사지가 떨려서 글을 못 쓰겠내(네)요. 조금 쉬었다 생각해 보갰읍(겠습)니다. 왜 이럭캐(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내요.”
군산항(전북 군산시 소룡동)에서 뱃길로 40여분 거리의 섬이었다.
“어여 와. 고생했네.”
배에서 내리는 송소연(진실의힘 상임이사)과 유현미(그림책 작가)를 선착장까지 나와 기다리던 임봉택(76)이 포옹하며 반겼다. 바다를 등진 그들 뒤로 멀리서 국가산업단지 굴뚝들이 신기루 같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개야도. 봉우리 없이 낮고 얇게 열린 섬. 사리(매달 음력 보름과 그믐) 때 “바람이 터져” 파도가 높아지면 섬을 오가는 배들이 예고 없이 끊겼다. “아침 배는 아침이 돼봐야, 오후 배는 오후가 돼봐야 뜰지 말지 아는”(선사 직원) 섬에선 파도의 기분에 따라 들고 남이 결정됐다. 전날 오후 운항 취소로 육지에서 하룻밤을 지낸 일행은 지난 1일 아침 배를 타고 섬에 닿았다. 두 사람이 임봉택에게 전할 종이상자 하나가 배에 동승했다. 상자 안엔 임봉택이 쓴 책 ‘거꾸로 매달아도 사는 게 좋다’(진실의힘) 50권이 담겨 있었다. 인쇄소를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잉크 냄새가 신선했다.
“나야 뭐 송 이사가 조종하는 대로 따른 것이제. 이거 써보라 저거 써보라 혀서 써 보냈더마는 책이 돼야 부렀네. 감개무량이구마.”
초등학교가 정규교육의 끝인 고문 피해자가 맞춤법 틀린 글자를 꾹꾹 눌러가며 쓴 글들이 국가 폭력이 망가뜨린 그를 꾹꾹 매만지며 일으켜 세웠다.
임봉택은 개야도에서 태어나 평생 어부로 살았다. 그 삶은 “목숨을 바람과 파도에 맞계(맡겨) 녹코(놓고) 사는 것”이었다. 그는 장애가 있는 형 대신 13살 때부터 아버지의 주꾸미잡이 배에 올랐다. 주꾸미 철이 지나면 꽃게잡이와 김 양식을 거들었다. 십대 후반부턴 선원으로 남의 배를 탔다. 인천과 충남 광천·강경 등을 오가는 새우젓 배에서 ‘화장’(식사 담당 선원)으로 일했고, 경남 마산·삼천포와 전남 고흥·목포 등 전국의 포구를 떠돌며 배에서 살았다. 1968년 5월 서조호 침몰 사고(20명 정원에 65명을 태우고 개야도를 출항한 무허가 연락선이 뒤집혀 16명이 사망하고 9명 실종) 땐 가라앉는 어머니를 건져낸 뒤 겨우 살아났고, 조기잡이 배를 타고 연평도에서 조업하던 어느 해엔 북한 경비정의 총격으로 동료 선원이 사망하기도 했다. 그 시절을 회고하며 임봉택은 “내 젊음은 막걸리 사발에 빠저(져)서 허우적거리는 파리 목슴(숨)과도 같았다”고 썼다.
“고조할아버지 산소까진 섬에 있는데 그 윗대는 내도 몰르제.”
선착장에서 몇 걸음 되지 않은 마을로 들어가며 그가 말했다. 걸어서 1시간이면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면적(2.17㎢)이었다. 자신의 선조들이 언제 어떤 이유로 뭍에서 건너와 그 왜소한 섬에 깃들였는지 임봉택도 알지 못했다. 가난한 섬살이는 쥐들이 겨울을 나려고 쥐구멍에 모아둔 벼 이삭까지 훔쳐 먹게 했고, 섬 주민들은 해변으로 떠밀려온 나무 부스러기들을 쟁탈전 벌이듯 건져내 땔감으로 썼다. 어렸던 그때나 노년의 지금이나 개야도는 관광과는 무관한 섬이었다. 길 가장자리마다 그득히 쌓인 그물과 부표가 해변의 생활 쓰레기들과 더불어 섬의 풍경을 이뤘다.
“1972년도 1월경이였(었)다.”
그의 생애 첫 글쓰기는 이 문장에서 출발했다.
13년 만에 쓰기 시작한 글
“그 추운 겨울밤에 팬티 하나 남기지 안(않)고 모두 벗겨 녹(놓)고 주먹으로 때리는 놈, 발길로 차는 놈, 박(방)망이로 때리는 놈, 글로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차고 때리며 그 책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였(었)다. 그러나 나는 보지도 듯(듣)지도 못한 책을 어떡캐(어떻게) 내노(놓)을 것인가.”
조기 철이 되면 개야도 어부들은 흑산도와 홍도, 가거도까지 내려가 조업을 한 뒤 북상하는 조기를 따라 연평도까지 올라가곤 했다. 북방한계선에 바짝 붙어 조기를 쫓다가 북한 경비정에 피랍되는 일들이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 친구 박춘환(1946년생)이 선원으로 일했던 영창호도 1968년 5월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다가 납북됐다. 북한에서 5개월간 억류됐다 돌아온 박춘환은 수산업법 위반 등으로 8개월을 복역했다. 출소 뒤 다시 뱃일을 하던 그를 1972년 1월 군산경찰서 형사들이 잡아갔다. 영장도 없이 끌고 가 매질과 전기고문을 했다. 공동묘지 구덩이에 던져넣고 살해 위협도 가했다. 박춘환은 결국 ‘납북 당시 북에 포섭됐고 귀환 뒤 북을 위해 국가기밀을 탐지했다’고 허위자백했다. 북한 간첩에게 받은 불온서적 두권을 임봉택과 다른 친구 유명록(77)에게 줬다는 진술이 조작된 혐의에 추가됐다. 박춘환에게 받은 책을 내놓으라며 형사들이 두 사람을 고문했다.
“그것도 안대것든(되겠던)지 수건을 네(내) 코에 씨(씌)우드(더)니 주전자에 물을 담았다. 주전자 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꺼(거)꾸로 매달린 네(내) 코에 붓는 거였다. 숨을 들어(이)마시면 물이 코(콧)구멍으로 들어오고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마시면 수건이 코구멍에 달라붓터(붙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금방 죽을 것만 같았다.”
책을 본 적도 없다며 임봉택이 “뻐기자”(버티자) 고문 강도도 세졌다. 그는 고문의 기억을 생생한 글로 써냈지만 여전히 너무 생생해서 기억 그대로 옮기지 못했다.
“그것도 안대(되)겠든(던)지 이번에는 라디오만 한 네모진 것을 같(갖)다가 벽에 있는 전기와 연결했다. 그곳에서 선을 뽑아다가 녹코(놓고) 내 몸에 물을 끼었(얹)더니 그 전선을 내 몸에 데(대)었다. 나는 그 순간을 어떡캐(어떻게) 말해야 할런(는)지 그 고통을 글로는 표현할 수 없써(어) 그만 생략하겠다.”
표현할 길이 막힐 때마다 임봉택은 글에 숨구멍을 냈다. 문자들을 비집고 그의 음성이 튀어나왔다. “참 기가 막힐 일이 아니갰(겠)습니까.” 흥이나 분노를 돋우려는 판소리의 추임새 같기도 하고. “생각들을 해보시요(오). 간첩이 아니라 간첩 할에(애)비라도 그런 고문을 밭(받)으면 책을 내놋치(내놓지) 안(않)고 견디어낼 인간이 어디에 있갰(겠)습니까.” 독자들에게만 들려주겠다며 소곤대는 방백 같기도 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다 보니 내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치밀어 올라와 답답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도내(네)요.” 격렬하게 억울함을 토로하다 갑자기 휴식을 갖겠다거나. “글을 쓰다 보니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잠깐 쉬엤(었)다 가는 것이 장땡이지.” 한참 두들겨 맞는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쓰다 보니 지루한 생각이 들어 머리도 식힐 겸 시 한 수 익(읽)고 갑시다. 제목은 사랑.”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책을 펼쳐 보며 임봉택이 싱글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가슴이 막막항께 좀 쉬었다 써야지 않겄소.”
글 읽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말을 거는 문장들이기도 했다.
“책이 될 거란 생각은 꿈에라도 한 적 없지만서도 누군가 훗날 우연히라도 봐준다믄, 아, 그 임봉택이가 이렇코롬 험한 세상을 살아냈구나, 하믄서 내 인생을 조금은 이해해주지 않겄나 했겄지요.”
글 속 그의 목소리가 마침내 그 단어를 꺼냈다.
“지옥이 따로 있겠습니까. 정말로 지옥 아닌 지옥이였(었)습니다.”
“아, 아버지…”
이승의 지옥이 훨씬 혹독한 법이었다.
불법 구금(박춘환 33일, 유명록 29일, 임봉택 27일)이었으므로 낮엔 형사들이 여인숙으로 빼돌려 감금했다가 통금이 되자마자 경찰서로 데려와 다시 고문했다. 있을 리 없는 책을 받았다고 임봉택이 거짓 실토했지만 책을 숨겼다고 알려준 곳에 책이 없자 고문은 더 가혹해졌다.
“옷을 홀랑 벗기더니 물읍(무릎)을 꿀어안처녹고(꿇어앉혀놓고) 꿀어안즌(꿇어앉은) 다리 사이에 세(쇠)파이푸(프)를 끼워 넉(넣)고 양손을 디(뒤)로 제끼어서(제쳐서) 발목에다 양손을 합처(쳐)서 꽁꽁 묵(묶)어 놋터(놓더)니 일메타(미터)도 넘을 정도의 파이푸를 형사 놈이 양 끗(끝)에서 밥(밟)기 시작했다. (…) 정강이는 세면(시멘트) 바닥에 짓이겨(져)서 피가….”
경찰도 존재하지 않는 책까지 만들어낼 순 없었다. “박춘환의 (책 관련) 진술은 허위사실”이라며 수사를 종결하면서도 임봉택·유명록을 풀어주진 않았다. 대신 ‘박춘환의 북한 찬양을 듣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새 혐의를 붙여 불고지죄로 몰았다.
“사람을 반 죽여놓고 죄 없다 하고 내보내믄 책임을 져야 하니께 엉뚱한 혐의를 씌운 것이제.”
세 사람의 고문 흔적과 앞뒤 안 맞는 수사 보고만 봐도 조작 정황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검사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을 적용해 그들을 기소했다. 법원은 박춘환에게 징역 7년, 임봉택·유명록에겐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임봉택이 판사를 향해 “내가 무순(슨) 죄가 있다고 징역을 살아야 하냐고 울부짖”자 “교도관들이 우르르 몰려와 번쩍 들고 박(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형기를 모두 채운 뒤에야 교도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출소 23년 뒤인 1995년 9월 임봉택은 텔레비전 뉴스에서 ‘잊지 못할 이름’을 들었다. 그를 불고지죄로 기소했던 검사 김기수가 제27대 검찰총장이 됐다는 소식이었다.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맨든 검사가 총장이 되는 나라라니 참말로 어이가 없었”다. 임봉택은 자신을 고문한 형사들의 실명을 글과 책에 또박또박 써넣었다.
“그놈들 이름 안 잊히도록 분명히 적어놔야잖여요.”
그 이름들 중 한명이 재심(2010년 6월18일 무죄 선고) 때 재판정에 출석했다. “잊을 수 없는 악질 형사 놈이 의자에 버티고 안(앉)아 있는” 모습에 임봉택은 “손발을 덜덜 떨었”다. 임봉택·유명록을 아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며 잡아뗐다. 벌떡 일어난 임봉택이 증인석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여보시오, 당신 진짜로 우릴 몰라요?”
그가 임봉택을 쳐다보며 부인했다.
“내가 당신들을 어떻게 알아요?”
임봉택이 판사에게 외쳤다.
“이 사람이 어딜 때린 줄 아십니까? 지(자기)가 당수를 했다면서 손날을 세워 모가지만 쳤습니다.”
12월을 여는 첫날 개야도엔 새벽 눈이 내렸다. 눈이 다 녹지 않은 오후 임봉택이 봉분 낮은 무덤을 쓰다듬었다. 날마다 산책처럼 찾아오는 무덤 곁을 굵은 향나무가 지키고 있었다.
“‘나 없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 저 오늘도 왔어요’ 해봐요.”
옆에서 아내 편복희(63)가 말했다.
“아이고 어머니, 그게 뭔 얘기다요?”
출소 당일(1972년 12월4일) 경찰서로 마중 온 어머니가 전한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임봉택이 놀라 물었다. “네가 간첩으로 교도소 갔다고 개야도에 소문이 나서 그 소리 듣고 그날 저녁 아버지(당시 52살)가 목을 매셨다”며 어머니가 통곡했다. 중학교도 못 보낸 아들이 배에서 노 젓다 말고 시린 손을 호호 부는 모습에 고개 돌려 눈물짓던 아버지였다. 50년도 더 된 아버지의 죽음이 그 아버지보다 스무살도 더 먹은 임봉택을 다시 울렸다. 그가 손으로 심장 쪽을 움켜쥐었다.
“될 수 있으면 아버지 일 입에 안 올릴려고 하는디. 아 죽겄네. 가슴이 멕혀서 말을 할 수가 없어.”
섬에 하나뿐인 학교가 무덤 근처에 있었다.
“나 댕길 땐 1학년부텀 6학년꺼정 학년당 30명씩은 되얐는디 지금은 전교생이 두명뿐이여.”
조작간첩 사건의 종범들(임봉택·유명록)이 다녔고 주범(박춘환)은 그나마도 다니지 못한 초등학교였다. 그 학교 운동장에서 2009년 6월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후원한 ‘납북귀환어부 사건 진실규명 결정(그해 4월20일)에 따른 개야도 주민 화해 한마당’이 열렸다. 박춘환은 자신의 허위자백으로 고초를 겪은 임봉택에게 “지금까지 어렵게 살게 해서 미안하다”며 울었고, 임봉택은 “정말 미웠지만 그 옛날 친구로 돌아가자”며 박춘환을 끌어안고 울었다.
달력 뒷장 잘라 만든 ‘글씨 연습장’
“형님, 책 드리러 왔소.”
내려다보면 섬의 전경이 환하게 펼쳐지는 언덕 위에서 임봉택이 정삼근(80)을 불렀다. 동생을 집 안으로 맞아들인 정삼근이 “책 이쁘다”며 출간을 축하했다.
정삼근도 박춘환과 같은 배를 타고 납북됐다. 귀환 뒤 반공법 등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살았다. ‘박춘환 사건’을 피해갔던 그는 납북 17년 뒤인 1985년 5월 보안대로 끌려갔다. 납북어부 반공교육으로 참여했던 산업시찰이 고정간첩의 기밀 탐지 활동으로 탈바꿈했다. 그해 11월 주요 일간지 1면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북괴의 지령에 따라 폭력 소요를 일으키거나 군사기밀을 수집해온 5개 간첩망”의 조직원으로 보안사가 그를 끼워 넣었다. 쿠데타와 학살 위에 세워진 전두환 정권은 꿈틀대는 민주화 요구를 짓누르는 데 조작간첩 사건들을 활용했다. 정삼근은 52일의 불법구금과 고문 뒤 7년 동안 옥(2009년 1월23일 재심 무죄)에 갇혔다.
개야도는 불의한 정치가 간첩이 필요할 때마다 낚아 올리던 ‘황금어장’이었다. 1960년대에만 광룡호(1960)와 대덕호(1963), 승룡호(1967), 영창호(1968), 제5공진호(1968)가 차례로 납북됐다. 어부들은 귀환 뒤 처벌을 받고서도 지속적으로 끌려가 간첩으로 둔갑됐다. 승룡호 선원 이길부는 납북 9년 뒤인 1976년 다시 잡혀가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은 아예 개야도 마을회관 앞에서 열렸다. 수갑을 차고 밧줄로 꽁꽁 묶인 이길부는 “공개처형 당하듯”(주민 증언) 공포정치의 희생 제물이 됐다.
“사건별 직접 피해자 외에 참고인으로 경찰서나 보안사에 불려가 고문받거나 조사받은 이웃 등을 모두 더하면 100여명이 된다. 당시 1천여명이던 섬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수였”(송소연)다. 개야도는 ‘간첩섬’으로 불렸다. “바다 건너 군산항서 경비선이 뜨믄 이번엔 또 누굴 잡아갈라고 오나 싶어 벌벌 떨던”(임봉택) 작은 섬마을은 그렇게 찢겨나갔다. 1979년 출소한 박춘환도 섬에서 살 수 없어 군산 밖으로 나갔다. 화해식이 열린 2009년에야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섬을 찾았다. 정삼근이 말했다.
“같이 납북됐던 영창호 선원들 다 죽었잖아. 춘환이도 죽고 나 혼자 살아 있어. 잊어야지 해도 어떻게 잊어.”
지난 5월 임봉택은 세종시 조치원으로 박춘환을 만나러 갔다. 암 투병 중인 박춘환이 임봉택의 손을 잡으며 쓸쓸하게 웃었다.
“너희들한테 죄를 지어서 내가 병에 걸렸나 봐.”
임봉택은 “그런 소리 말라”며 친구를 안았다.
“고문받던 세상도 다 이겨내고 살았는데 말여. 지금 와서 이렇게 아파버리면 어떡허냐.”
바다에 나가 함께하지 못한 유명록은 박춘환과 전화통화를 했다. “죽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박춘환에게 “죽는다는 소리는 빼라”며 타박했다.
“그래, 안 죽고 살게. 너 얼굴 보고 죽을게.”
약속 한달 뒤 박춘환은 유명록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형님도 써봐요.”
임봉택이 정삼근에게 글쓰기를 권했다.
“뭐라도 쓰니께 마음이 좀 편해지더만요.”
정삼근은 “책을 몇 권이나 쓰면 편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임봉택의 책을 만지작거렸다.
임봉택의 글쓰기는 정삼근이 잡혀간 1985년 시작됐다. 아버지 무덤을 벌초하다가 눈물을 왈칵 쏟은 날이었다. “이 억울한 일을 그냥 묻어버리믄 안 되겄다”는 생각에 “작정하고 쓴 것이 아니라 갑작스레 쓰고 말았”다.
섬이라 종이가 귀했다. 물때를 알려주는 어민 달력 뒷장을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잘라 실로 묶었다. 겉장엔 “글씨 연습장”이라고 썼다. “잽혀갔을 때 형사 놈들이 집을 싹 뒤져 간 일이 떠올랐”다. “뭔 일이 또 생길 줄 몰르니께 덮어씌우지 않을” 제목을 붙였다.
“처음엔 뭘 쓰게 될까 몰르고 썼는데 쓰다 보니께 생각 안 나던 것들꺼정 생각나더라고.”
막막했던 글쓰기가 “쓰다 보니” 이어졌다. “조금씩 쓰니 조금씩 더 써졌”다. 조작간첩 피해자들을 돕던 송소연은 1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한 2005년 임봉택을 처음 만났다. 송소연을 찾아온 그의 손에 두권 분량의 ‘글씨 연습장’이 들려 있었다. 임봉택은 “피해 경험을 자발적으로 써온 유일한 분”(송소연)이었다.
글씨 연습장은 이후 그가 수없이 써온 피해 사실들의 초고가 됐다. 진실화해위와 재심·손해배상소송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최후진술문 등을 되풀이해서 쓰며 ‘달달 외울 지경이 된’ 문장들이 그의 응어리를 다독였다. 임봉택은 알게 됐다.
“글이란 게 이런 효과가 있구나 싶데요.”
“형사 놈들한테 내놓을 책이 생겼다”
임봉택의 글쓰기는 고문 피해를 증언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어린 날의 가난과, 청년기의 방황과, 바닷일의 고됨과, 아내와의 첫 만남을 되살렸다. “김 어장 말아먹고, 배 부숴 먹고, 집 팔아먹은 일”을 옛이야기 들려주듯 써나갔다. 배 기름값, ‘식고미’(배에서 조리할 식재료) 구입비, 아내 병원 치료비와 딸 등록금 등을 빠짐없이 기록한 금전출납부엔 팍팍한 섬살이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두리는 1989년 7월27일 오후 5시30분에 태어났다.”
글 중엔 ‘육아일기’도 있었다. 누군가 선물한 열쇠 달린 일기장에 딸을 맞이한 아빠의 기쁘고, 두렵고, 경이롭고, 안절부절못하는 마음들을 적어나갔다. “열쇠로 채워놔서” 아내도 읽어보지 못한 일기였고, “뭔 자랑이라고 말하겄냐”며 딸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일기였다. 그해 10월16일 일기엔 동요 ‘섬집 아기’를 닮은 먹먹하고 서늘한 글이 실려 있다.
“오늘은 주의보가 내리고 바람이 만(많)이 불어 아빠가 바다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엄마가 바닷가로 굴 따러 간 대신에 아빠가 엄마 대신 우리 두리를 보았다. 우리 두리는 젗(젖)만 배불리 먹여주면 잘 자고 잘 노는 아이니까.”
딸이 초등학생이 됐을 땐 딸이 안 쓰는 노트에 어부의 일상을 담은 자신의 일기를 썼다.
“2004년 9월7일 화요일. 바람이 만이 불어 딴 배들은 (바다에) 나가지 않았는대(데) 우리는 나가서 귀(게) 40키로(㎏)를 잡아다가 성덕2호(첫 배 성덕호 완파 뒤 마련한 1.8t짜리 플라스틱 배) 물칸에다 담가노(놓)았다. 파도가 너무 높아 (통발을) 6줄박(밖)에 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둘(두) 줄쯤 더 너(넣어)볼 생각으로 흐이(부표) 몇 개 더 만들어녹코 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연속극 좀 보다가 잘 예정이다.”
그의 글들은 오탈자와 비문투성이였다. 작가의 문장처럼 구성과 전개가 매끄럽지도 않았다. 그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자신의 삶을 투박하고 꾸밈없이 썼다. “빠이뿌(파이프)를 끼워녹코(놓고) 비틀”어 지금도 “휘어저(져) 있”는 “왠(왼)쪽 엄지손가락”으로 펜을 잡고 한 자 한 자 채워나갔다. 그 글들에서 인간에게 쓰는 행위란 무엇인지, 글쓰기가 어떻게 사람을 살게 하는지, 부서진 삶도 어떻게 반짝일 수 있는지가 투명하게 읽혔다.
너무 일찍 학교 공부를 마쳐야 했던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문장을 옮겨 적으며 스스로 공부했다. 바둑이가 그려진 어린이 공책에 ‘알아서 배우자: 배우고 싶은 글들’이란 제목을 달아 독후감을 썼다. 서승의 ‘옥중 19년’을 읽었을 땐 편지 형식을 빌렸다.
“얼마나 고문에 견디기 힘들었으면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부첯(붙였)겠습니까. 직접 당해보지 안(않)은 사람은 절대로 그 순간의 심정을 모름(릅)니다. (…) 철줄보다 강한 인간의 목슴(숨)줄이 선생님에게 있읍(습)니다.”
이면지를 모아 메모장도 만들었다. “메모를 만(많)이 할수록 배울 점이 많다”는 문장을 겉장에 부제처럼 써뒀다. 손가락 꼽으며 세어온 숫자를 혹시라도 잊을까 군데군데 메모로 남겼다.
“2020년도 현제(재) 우리 아버지 사망하신 했수(햇수) 49년.”
임봉택은 고문 피해자들이 국가 배상금을 모아 설립한 재단 진실의힘의 이사이기도 했다. 송소연은 임봉택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을 쓰도록 권했다. 임봉택이 조각 글들을 써 보내면 송소연이 맞춤법을 살펴 편집한 뒤 재단 소식지에 실어 회원들과 나눴다. 임봉택의 글을 읽을 때마다 송소연은 “선생님의 글이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그 글들을 모으고, 추리고, 맥락을 잡고, 시간순으로 재배열해 책으로 엮었다.
“‘옜다, 책 여기 있다’고 해버리세요.”
송소연이 임봉택에게 책을 건네며 말했다.
“(없는 책 내놓으라며 고문하던) 형사 놈들한테 이제 내놓을 책이 생겼다”며 임봉택이 껄껄 웃었다.
그는 3년 전 평생 해오던 바닷일을 정리했다. “일만 하다 골병들어 죽으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미련이 남을까 봐 배도 팔아버렸다. 그는 집 앞에 꽃밭(유현미가 그린 표지 이미지)을 만들었다. 장날이 되면 뭍으로 나가 꽃나무를 사왔다. 동백, 수선화, 작약, 봉선화, 백합, 접시꽃, 분꽃, 옥잠화 등이 계절을 달리하며 그의 꽃밭을 밝혔다. 쇠락한 섬마을이 그 꽃밭에서 화사하게 주름을 폈고, 외딴섬에 와서 일하는 타국의 이주노동자들이 꽃들의 인사를 받고 주름을 폈다.
새벽 5시20분 임봉택의 생각
임봉택은 지금도 새벽 5시면 일어나 책을 읽고 뉴스를 살폈다. 책장 하나 없는 집의 한구석엔 그가 최근 읽은 책들이 상자에 담겨 쌓여 있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서경식), ‘순이 삼촌’(현기영), ‘소년이 온다’(한강),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박상은), ‘가면권력: 한국전쟁과 학살’(한성훈), ‘꿈꾸는 자 잡혀간다’(송경동) 등이 상자에서 쏟아졌다. 책을 읽다 쓸 거리가 생각나면 침대에 앉아 소반을 받쳐두고 모나미 볼펜을 들었다. 지난해 그는 미리 쓰는 유언장처럼 연명치료 거부의 뜻을 적었다.
“나는 어떠한 생명 유지 장치도 원하지 않는다. 내 몸의 어떠한 부분이든 내 생명이(을) 유지할 수 업(없)는 형편이라면 모두 기증하고 싶다. 2022년도 8월20일 새벽 5시20분에 임봉택의 생각이다.”
출소 직후 자신을 피하는 눈길들이 싫어 섬을 떠났던 25살의 임봉택이 41살에 돌아와 76살이 됐다. 그에게 “모진 수난을 안긴 섬”이었지만 임봉택은 생의 마지막을 개야도에서 맞길 바랐다. 그는 글의 끝자리에 이 문장(교정·교열 전)을 뒀다.
“내 삶은 오직 바다의 생활이였(었)고 바다가 아니면 나는 살아가(갈) 곳이 없었다. 어머니의 품 안처럼 따뜻한 개야도에서 사랑하는 두리 어(엄)마와 오순도순 살아갈 것이다.”
군산 개야도/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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