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그대’에서 ‘마이 데몬’까지…한국형 판타지 로맨스의 진화

한겨레 2023. 12. 2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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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 새로고침][한겨레S]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대등한 남녀관계 참신한 설정
별그대·도깨비·호텔 델루나·멸망…
식상한 ‘로코’ 대안으로 주목
혼종성 높여 글로벌 콘텐츠로
‘마이 데몬’(2023). SBS 누리집 갈무리

드라마 ‘마이 데몬’은 재벌가의 당찬 여성 도도희와 비인간 남성의 판타지 로맨스이다. 김유정과 송강이 빚어내는 얼굴 합이 최강이고, 티키타카의 대사발이 좋고, 칼춤·탱고 등 춤을 가미한 뮤지컬 감성이 뛰어나다. 보고 있으면 도파민이 분비되는, ‘눈으로 핥는 탕후루’ 같다.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면, 독창성이다. 매 장면 재미있지만, 익숙한 클리셰들의 조합이란 느낌이 강하다. 여러 작품이 떠오르는데, 이쯤 되면 한국형 판타지 로맨스도 하나의 장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마이 데몬’만의 서사적 매력을 짚으면서, 한국형 판타지 로맨스 장르가 지닌 글로벌 콘텐츠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콘텐츠에서 ‘한국 남자의 소멸’이라는 징후를 말해보려 한다.

‘키링남’이길 원하는 여성 욕망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2021). tvN 누리집 갈무리

‘마이 데몬’은 최아일 작가의 오리지널 대본이다. 하지만 도입부를 보면,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2021, 이하 ‘멸망’)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가령 ‘멸망’이니 ‘데몬’(악령·악마)이니 하는 부정적인 이름의 비인간 남주인공이 등장해 “하찮은 인간 따위”라는 냉소적인 대사를 뱉는다. 이들은 ‘계약’을 중시하는 존재로, 불공정(?) 계약을 미끼로 여주인공을 쫓아다닌다. 여주인공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에서 남주인공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관계가 시작된다. 흔히 한국 드라마의 병폐로 꼽히는 ‘여주인공 손목 낚아채기’를 대놓고 보여주며 아예 “충전”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도 흡사하다.

이런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멸망’은 ‘쓸쓸하고 찬란한’ 삶과 죽음에 대한 처연한 세계관을 깔고 있다. 반면 ‘마이 데몬’은 유쾌하고 코믹하다. 남주인공 캐릭터도 다른데, 멸망(서인국)은 자신의 불멸성을 환멸하면서 소멸하길 원한다. 하지만 데몬은 불멸의 삶을 “개꿀”이라 즐기다, 이제 죽음을 두려워한다. 데몬에겐 애초에 페이소스가 없다. 데몬은 수많은 판타지 로맨스의 남주인공답게 잘생기고 부유하고 귀족의 풍모를 지녔지만, 심각하게 무게를 잡지 않으며, 천진하고 귀엽다.

드라마는 1회에서 데몬의 능력이 도도희에게 옮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1회와 4회에서 도도희가 데몬을 구한다. 도도희가 없으면 데몬은 강한 남자가 아니며,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받는 도도희를 지키기 위해 경호원을 자처하여, 2회와 5회에선 데몬이 도도희를 구한다. 일방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구하는 서사가 아니라, 상호 구원의 서사이다. 인간 여성과 비인간 남성의 로맨스인데, 이토록 대등할 수가!

반면 도도희는 강한 면모를 지닌다. 그는 이름처럼 도도하며, 내숭 없는 담백한 매력을 지닌다. 재벌가의 상속녀지만, 단순한 금수저가 아니다. 고아나 다름없는 자수성가형 상속녀로, 안팎으로 싸워야 할 적이 많다. 도도희와 비견되는 캐릭터로 ‘사랑의 불시착’(2019)의 윤세리(손예진)를 꼽을 수 있다. 주변 상황은 윤세리보다 더 극악하며, 윤세리를 능가하는 용기와 야망을 지닌다. ‘데몬’과의 관계를 주도하는 것도 도도희다. 스킨십을 암시하는 발언을 먼저 던지고,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 밤중에 찾아가고, 먼저 청혼한다. 데몬은 반응이 조금 늦지만, 이내 자기감정을 알아채고 강아지처럼 ‘데헷’ 속내를 드러낸다. 둘의 관계성은 8회에 응축돼 있다. 데몬이 죽을까 봐 걱정된 도도희가 야망을 포기하려 하자, 데몬은 “상관없어!”라 말한다. 나는 죽어도 좋으니, 여자의 야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경호원, 남편, 반려생물 혹은 ‘키링남’이다.

‘쓸쓸하고 찬란하신―도깨비’(2016). tvN 누리집 갈무리

같은 판타지 로맨스였던 ‘쓸쓸하고 찬란하신―도깨비’(2016, 이하 ‘도깨비’)나 ‘멸망’에서 비인간 남성과 인간 여성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비대칭적이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마이 데몬’이 추구하는 대등한 관계가 상당히 특이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미남-부자-귀족-비인간 남성을 욕망하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관계에 있어서 권위와 주도권을 지닌 남자를 버거워하며, 무게 잡지 않는 대등한 존재이거나 심지어 귀여운 ‘키링남’이기를 원하는 여성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독특한 세계관 ‘멸망’ 뒤늦게 화제

‘마이 데몬’에서 케이크를 즐기는 비인간 남성이 등장할 때, ‘멸망’ ‘구미호뎐’ ‘도깨비’ 등이 주르륵 떠오른다. 그만큼 한국형 판타지 로맨스의 켜가 두텁다는 뜻이리라.

한국형 판타지 로맨스의 기점은 ‘별에서 온 그대’(2014, 이하 ‘별그대’)로 잡을 수 있다. 수백년간 살고 있는 비인간 남성과의 로맨스라는 설정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별그대’는 조선왕조실록 속 유에프오(UFO)를 연상시키는 구절에서부터 에스에프(SF)적인 설정을 간단하게 따왔다. 조선시대 어린 과부를 등장시켜 여주인공의 전생을 암시했지만, ‘떡밥’ 회수는 지지부진했다. 그보다는 현생에서 부자 도민준과 톱스타 천송이의 매력에 집중했다. 도민준이 외계로 떠나고, 시간 여행자가 되어 간간이 돌아오는 결말은 할리우드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세계관을 떠올리게 한다. ‘별그대’는 한국형 판타지 로맨스의 시작을 연 작품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세계관의 고민은 얕은 편이다.

‘도깨비’는 한국형 판타지 로맨스 장르를 본격적으로 연 작품이다. 한국 민담을 중심으로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함으로써, 판타지의 깊이를 더했다. 고려의 장군이었으나 신의 능력을 지닌 도깨비로 거듭나 900년간 사는 남주인공을 등장시키고, 죽을 운명이었으나 이승에서 불법 체류하고 있던 소녀와의 사랑을 그렸다. 그 외에도 저승사자, 삼신 할매, 창조신 등의 캐릭터를 재창조함으로써, 기존에 알고 있던 민담적 세계관을 뒤흔들어놓았다.

‘호텔 델루나’(2019). tvN 누리집 갈무리

‘호텔 델루나’는 ‘도깨비’가 펼쳐놓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간이나 윤회 등을 계승·발전시키고, 상징을 고도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세계관을 심화했다. 그리고 젠더의 역전을 꾀해 비인간 여성의 존재를 전면에 내세웠다. 자본주의적 욕망은 물론이고, 복수의 욕망까지 활활 타오르는 장만월(이지은) 캐릭터는 무한한 해방감을 안겼다. 한편 ‘구미호뎐’은 ‘도깨비’의 성공을 훨씬 안전하게 활용한 파생 상품이다. ‘도깨비’에서 저승사자 역을 맡았던 배우 이동욱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 캐릭터를 구축하고, 민담에서 주로 여성으로 그려졌던 구미호를 남성으로 전유해, 비인간 남성과 인간 여성 사이의 판타지 로맨스를 엮었다. ‘도깨비’가 재해석한 민담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호러와 액션의 요소를 강화해 잔재미를 더했다. 이후 시리즈로 만들어질 만큼,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멸망’은 획기적인 변주로, 독특한 세계관을 펼쳤다. ‘멸망’은 파괴의 신으로 소녀신에 의해 태어난 존재다. 소녀신은 세상의 관리자이자 오래된 질서다. 여기까지 들으면 힌두교의 ‘시바’와 ‘비슈누’인가 싶다. 여기에 운명과 윤회까지 강조되니 더더욱. 아니, 한국 민담도 서양 민담도 기독교도 아닌 힌두교라니! 놀라긴 아직 이르다. 소녀신은 인간이 신의 존재를 원했을 때 탄생한 존재다.(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소녀신은 인간의 죄와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받는 존재로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한다. 세상을 멸망시키고팠던 ‘멸망’이 죽어가는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여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소멸을 선택한다. ‘멸망’은 독창적인 수작이지만 방영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올해 오티티(OTT)에 공개되면서 뒤늦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별그대’ 이후 10년간을 되짚어보면, 외국의 드라마 시장에서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가 오랫동안 입지를 구축해왔으나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평을 듣고 있던 차에 한국의 판타지 로맨스들이 상당한 호평을 받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드라마 제작사가 더욱 주력할 장르가 판타지 로맨스가 아닐까. 한국 민담, 중국 민담, 일본 민담, 서양 민담,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힌두교, 전래동화, 무협, 근대 판타지 문학, 이슬람 문학, 남미 문학, 할리우드 영화, 에스에프 등을 뒤섞어 혼종성을 높인다고 할 때, 한국 문화권만큼 유리한 위치에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동서양의 문화를 모두 접하고 있으며, 구성원들의 종교적·문학적 감수성도 높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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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의 소멸

이쯤에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별그대’ 이후 ‘마이 데몬’에 이르기까지 왜 이토록 많은 판타지 로맨스물이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 더 정확히, 미남-부자-귀족-비인간 남성과의 로맨스가 왜 이토록 흥한 걸까. 그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듯이 현실 속의 ‘한국 남자’와의 로맨스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별그대’에서 ‘마이 데몬’에 이르기까지 여주인공들은 계급적으로 보면 재벌부터 가난한 고아 소녀까지 다양하지만 모두가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 한국 여성들이 체감하는 삶이 그러하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 리스크를 증가시킬 ‘한국 남자’와의 로맨스를 생각하기 어렵다. 실장님이니 재벌 3세와의 로맨스도 끝이 좋을 것 같지 않다.

오래된 우스개로 ‘산토끼’의 반대말은 집토끼, 판 토끼, 죽은 토끼, 알칼리 토끼라 한다. ‘한국 남자’와의 로맨스가 불가능할 때, 그래도 이성애 로맨스를 포기할 수 없다면, ‘한국 남자’의 반대말로 무엇을 상상할까. 외계인, 도깨비, 구미호, ‘멸망’, ‘데몬’, 심지어 ‘북한 남자’(드라마 ‘사랑의 불시착’)다. 여기서 ‘북한 남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냥 ‘한국 남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한동안 영화에서 미남 배우들은 죄다 ‘북한 남자’를 연기했다. ‘의형제’ ‘은밀하게 위대하게’ ‘용의자’ ‘강철비’ ‘백두산’ ‘공조’ 등등. 콘텐츠 속에서 ‘한국 남자’가 사라지고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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