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 녹이는 팥죽 나눔…영등포 쪽방촌의 목요일
22년째 같은 자리서 봉사…"밥 한 끼에 이유 있나"
(서울=연합뉴스) 박형빈 기자 = "자 시간 다 돼갑니다. 빨리빨리 준비합시다~!"
체감온도가 영하 22도까지 내려간 지난 21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 쪽방촌 한편에 마련된 네다섯평 남짓한 가건물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20여명의 봉사자로 북적였다.
밖에서는 한솥 가득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팥죽을 쉴 새 없이 젓고, 안에서는 설거지와 그릇·수저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콧물도 얼어버릴 한파가 전국을 덮친 날이었지만 봉사자들은 미소와 온기가 가득한 얼굴로 바쁜 와중에도 저마다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든든한 한 끼를 준비했다.
매주 목요일 이곳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쪽방도우미봉사회' 소속 자원봉사자들이다.
내년 정년을 맞이하는 마포경찰서 형사과 베테랑 김윤석(60) 경감이 2001년 쪽방촌 일대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 조계사 불자들과 결성해 22년째 같은 시간 배식 나눔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김 경감은 봉사를 위해 1년 치 연차·대휴를 매주 목요일에 쏟아부을 정도로 나눔에 열정적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부터 허리가 굽은 노인까지 봉사자 대부분은 김 경감과 오래 뜻을 함께해온 사람들이다. 과거 김 경감에게 검거됐다가 '좋은 일 같이하면서 살자'는 권유로 쪽방촌 봉사를 시작한 이도 있다.
이른 새벽에 멸치육수를 우리고 정오에 국수를 배식하는 평소와 달리, 동지(冬至)를 하루 앞둔 이날은 팥죽 나눔을 준비하느라 유독 품이 더 많이 들었다.
봉사자들은 사흘 전부터 모여 반죽을 만들어 새알심을 빚고 팥을 빻았다.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지원금 한 푼 없이 순수하게 후원자들의 기부금만으로 빠듯하게 살림을 꾸려 사소한 재료도 완제품을 사는 건 언감생심이라고 했다.
두꺼운 겨울 점퍼를 입은 쪽방촌 주민들과 인근 노숙인들은 오전 11시 무렵부터 삼삼오오 배식소 근처에 모여 질서정연하게 줄지었다. 배식이 시작되는 12시께에는 장사진을 이뤘다.
김 경감의 말에 따르면 보통 500명 내외의 주민들이 매주 목요일 이곳을 찾는다. 하지만 여러 그릇을 먹고 포장까지 해가는 주민들을 위해 항상 두세배의 인원이 먹을 만큼 넉넉하게 준비한다고 한다.
정오가 되자 안내에 따라 쪽방 주민들이 간이 식탁에 앉았고, 넓은 그릇에 담긴 따뜻한 팥죽 한 그릇이 저마다 앞에 놓였다.
금세 한 그릇을 비우고 두 번째 그릇을 한가득 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식사를 마친 뒤 뒷사람을 위해 자리를 곧장 비워주는 주민들도 보였다.
다 먹은 그릇을 반납하며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는 빼놓는 법이 없었다.
봉사회는 이날 팥죽뿐만 아니라 후원자들이 마련한 라면과 각종 떡 등도 포장해 한손 가득 들려 돌려보냈다.
6년째 쪽방촌에 살고 있다는 A씨는 "여기 모인 사람들은 한 끼 한 끼가 고비인데 매주 오셔서 밥을 챙겨주니 고마울 따름"이라며 "추운 겨울에 속이 든든해져서 간다"고 말했다.
사업 실패 후 노숙을 전전하다 10여년 전 쪽방촌으로 들어왔다는 다른 주민 B씨는 "여기 사람들이 무뚝뚝한 것 같지만 정이 많고, 마음속으로는 다들 저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며 "매주 얼굴을 보니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이처럼 봉사회의 무료 급식은 단순한 '한 끼'를 제공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쪽방촌 주민들이 한곳에 모여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광장 역할을 하기도 하고, 봉사자들과 주민들이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고독과 쓸쓸함에 익숙해져 유독 표정과 말수 없는 이들이 많은 쪽방촌이지만 여기서만큼은 서로를 '형님', '언니'로 부르며 호탕한 웃음을 보인다.
이곳에서의 봉사가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봉사회가 사용하는 가건물은 현행법상 불법 건축물이란 이유로 해마다 수백만 원의 이행강제금을 내며 퇴거 압박을 받고 있다.
김 경감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며 "어려운 사람들이 여기 있는 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퇴직 후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트럭을 몰고 다니며 채소 장사를 하며 봉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그에게 봉사하는 이유를 물어보자 퉁명스러운 대답 한마디가 돌아왔다.
"어렵고 배고픈 사람들한테 밥 한 끼 보시(布施)하는 데 뭐 이유가 있겠어."
binzz@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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