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했던 스파링…종료 직전 팔이 나갔다 [ESC]
“잘되는 날 다친다” 예언처럼
암바 공격 방어하다 관절 빠져
약해진 몸·정신 추스르는 계기
“빌어먹을 코가 없어질 뻔했단 말이오. 난 내 코가 좋아요. 숨 쉬는 게 좋다고.”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사립탐정을 연기한 잭 니컬슨이 분노에 차서 말했다. 괴한의 습격으로 코가 망가진 직후였다. 나도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팔이 좋아요. 무거운 걸 번쩍 들고 남의 목도 조르고 자유자재로 움직였던 팔이 좋다고.”
멀쩡했던 팔을 잃은 건 한순간이었다. 스파링 중에 암바(어깨와 손목을 고정하고 팔꿈치를 꺾는 기술)를 방어하다가 팔이 빠진 거다. 죽기 직전에 주마등이 지나가는 것처럼 수많은 장면이 흘러갔다.
훈화 말씀 같았던 “부상은 언제 올까요?”
첫 장면은 열변하는 관장님이었다. “부상은 언제 올까요? 컨디션이 좋고 승급도 하고 주짓수가 잘되는 것 같은 날,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싶은 날, 그런 날 부상이 찾아옵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같아서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잔소리를 이처럼 또렷하게 기억하다니.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듯 생생하게 리마인드 되는 게 놀라웠다. 무의식은 알고 있었던 걸까? 이쯤에서 다칠 거란 걸….
이튿날 누가 봐도 다친 사람의 행색으로 정형외과에 갔다. 문진 중에 어떻게든 주짓수를 언급하지 않으려고 회피했다. 팔이 당겨지면서 관절이 빠졌다고 하자, 의사는 누가, 왜 팔을 당겼느냐고 물었다. 나는 운동 중이었다고 답했고 무슨 운동이냐는 질문에 결국 주짓수라고 실토했다. 의사가 모든 걸 알겠다는 표정을 내비칠 때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자가 된 기분이었다.
단독 콘서트의 무대처럼 높게 솟은 침상에 누워서 치료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심박 수가 오르기 시작했고 의사는 고글, 방수 앞치마, 라텍스 장갑을 차례대로 착용했다. 간호사는 길게 늘어선 주사기들의 열을 맞추고 있었다. 심박 수가 마구 치솟았다. “따끔해요” 하는 경고를 시작으로 팔과 어깨 주변에 주사를 열 대쯤 맞았다.
예민한 사람치고는 고통의 역치가 높은 편이어서 통증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견디기 힘든 건 심리적인 부담이었다. 모든 곳이 조절되고 조화롭게 움직이던 몸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이대로 주짓수를 다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무엇보다 팔이 불편한 사람, 그건 내가 아니다. 그동안 달려 있다고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팔에 작은 통증이 느껴지기만 해도 신경이 한곳에 집중됐다. 몸 전체가 거대한 팔이 된 것 같았다. 의사가 주사를 잘못 놓으면서 차가운 주사액이 얼굴에 튀었을 때, 아침에 바지를 입다가 멈칫하는 순간에, 잠결에 뒤척일 때, 형언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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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팔 망가뜨린 그가 미워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공격성을 감춘 하얀 얼굴, 문제의 스파링 상대. 내 소중한 팔을 망가뜨린, 나름대로 꽃미남이라 불리는, 관장님의 애정마저 독차지한 도장의 인기남. 누구를 미워하지 않는 게 생활의 신조인데도 그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이 미움이 버거운 이유는 정확함과 모호함이 불균질하게 결합한 탓이었다. 그와 스파링하던 중에 다친 건 정확한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적절한 공격이고 어디까지가 과도한 공격인지 알 수 없는 건 모호함에 속했다. 그도 나도 속칭 주짓수 도장의 ‘고인 물’(거의 매일 출석하는 붙박이)인데 마냥 미워하자니 마음이 지옥이고 그렇다고 통 크게 이해하자니 내 처지가 억울했다.
주짓수 도장에서 부상은 일상이라고 할 정도로 흔하다. 당연히 다친 사람이 있고 다치게 한 사람이 있지만 다시 안 볼 사이도 아니라서 유야무야 넘어간다. 그러나 누구도 말하지 않을 뿐 부상은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얼룩을 남긴다. 정말이지 불운했던 수요일 밤을 되새길 때마다, 습관적으로 팔이 빠질 때마다 그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와 대화하기로 했다. 우리는 문명인이고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지 않은가? 적지 않은 내 나이는 인생의 크고 작은 비극이 언어적인 소통을 무시함으로써 시작된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안다면, 아는 대로 행동해야 했다.
사실 대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가 모르는 걸 똑똑히 알려주고 잘못 기억하는 걸 바로잡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둘이 그날의 스파링을 복기하며 내버려진 기억을 불러들였는데 한 시간을 넘긴 대화가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웠다.
그날의 스파링은 끔찍한 부상만 아니면 정반대의 의미로 둘에게 모두 인상적이었다. 그와는 고작 두어 번 스파링한 게 전부인데 그날 기술의 수를 주고받는 과정이 어느 때보다도 재미있었다. 그는 기술적이면서 순발력이 뛰어나고 초기 방어에 능하며 근력까지 갖춘 상대였다.
스파링 중반쯤에 그가 항복을 의미하는 탭을 받아 갔고 그 일은 말하자면 신선한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탭을 쳤지만 연습 상황이었기에 5분 스파링은 이어졌고 종료 직전에 다쳤다. 다치기 직전까지만 해도 거의 정해지다시피 했던 스파링 상대 외에 더 다양한 이들과 훈련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차였다. 그렇게 볼 때 부상은 무수한 변수와 불운의 조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미안해했고 몇 번이나 그 일을 사죄했다.
그날부터 나는 취약해진 나를 받아들였다. 주짓수를 계속하려면 부상의 부담도 끌어안아야 한다. 부상이 전혀 없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몸과 정신이 취약해졌을 때 극복하는 방안도 내가 수련해야 할 많은 과제 중의 하나였다.
당분간은 평소처럼 훈련할 수 없어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보는 쪽을 택했다. 원래 운동은 시범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모사하는 게 기본이다. 잘 보는 건, 잘 따라 할 수 있게 되는 목적지까지 가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골절, 인대 파열, 관절 손상 등의 온갖 부상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처음으로 특별히 몸이 약한 이들의 고충도 눈에 들어왔다.
세계적인 서퍼인 마이클 핸슨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높은 차원이 기술적인 완성도를 뜻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이 말의 숨은 뜻을 안다. 가장 약해졌을 때조차 나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높은 차원이다.
양민영 작가
사회적기업 운동친구의 대표이며 ‘운동하는 여자’를 썼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운동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못 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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