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티 반군, 반이스라엘 선봉 ‘저항의 축’이 움직인다

정의길 2023. 12. 23.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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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지정학의 풍경][한겨레S] 지정학의 풍경
가자 전쟁 뒤 지정질서 변화
헤즈볼라 아닌 예멘에서 개입
홍해 공격에 미국도 대응 작전
국제물류 위협해 효과 극대화
하마스 “선 휴전, 후 인질 협상”
예멘 안사르 알라(후티 반군)의 무장한 병사가 지난달 홍해의 화물선 위에 서 있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이스라엘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무차별히 퍼붓는 가자 전쟁이 3개월째 접어들면서 중동 지정질서의 변화가 드디어 가시화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18일 예멘의 ‘안사르 알라’(신의 지지자들)의 위협에 대처하는 다국적 해상연합군 결성인 ‘번영 수호자 작전’을 발표했다. 안사르 알라는 가자 전쟁 이후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드론을 발사하고 홍해에서 이스라엘행 선박을 공격하고 있었다. ‘후티 반군’이라고 불리는 안사르 알라가 세계 교역의 병목 지점인 홍해에서 영향력을 드러내고, 미국 등 국제사회가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가자 전쟁이 구체적으로 야기한 첫 지정질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공고해지는 반미·반이스라엘 동맹

이스라엘 접경지가 아니라 2천㎞나 떨어진 홍해의 바브엘만데브해협에서 가자 전쟁이 초래하는 지정질서의 변화가 먼저 일어난 것은 그만큼 이 전쟁의 여파가중동 전역에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자 전쟁에서 ‘제3자’인 안사르 알라가 존재감을 드러내는 현실은 이 집단이 속한 이른바 ‘저항의 축’ 세력과 그 주도 국가인 이란의 영향력 증대를 가리킨다. ‘이란-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 정부-레바논의 헤즈볼라-팔레스타인 하마스-이라크의 시아파 무장세력-예멘의 안사르 알라’로 이어지는 저항의 축은 자신들의 반미·반이스라엘 대의를 내세워 이슬람권에서 지지와 영향력을 얻고 있다.

가자 전쟁 전 미국은 중동에서 세가지 축으로 자국과 동맹국들에 유리한 지정질서를 구축해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다. 첫째 축은 아브라함 조약(이스라엘과 친서방 수니파 국가들의 관계 정상화)의 결정판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교 수립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9월20일 폭스뉴스와 한 회견에서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 협상에 대해 “매일매일 가까워지고 있다. 처음으로 진지한 것 같다. 냉전 종식 이후 가장 큰 역사적 거래”라고 말해, 타결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둘째, 이란과의 국제 핵협상 복원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이란과의 국제 핵협상인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을 복원해, 이란을 국제사회로 복귀시켜서 순치시키고 핵 위협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란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국내의 강경파를 의식한 높은 조건에 이란이 반발해, 협상은 순조롭지 않은 상태였다.

셋째, 중국의 중동 진출을 막는, 야심적인 교역회랑 건설이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5월 초 사우디 등 중동을 순방하며, 인도 및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안보보좌관들과 만나 인도에서 사우디를 잇는 철도 등 대형 기반시설 건설을 제안했다. 인도에서 중동을 관통해 유럽까지 이어지는 교역회랑을 만들어, 중동에 진출하는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에 맞설 의도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인도’(I2)와 미국·아랍에미리트(U2)를 묶는 ‘I2U2’라는 다자협의체가 가동되고 있다.

미국은 아브라함 조약, 이란과의 핵협정 복원, 중동 교역회랑 건설이라는 3축으로 중동 정세를 안정시키고는 인도·태평양에서 중국과의 대결에 주력하겠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가자 전쟁의 발발은 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무함마드 사우디 왕세자는 9월20일 폭스뉴스 회견에서 이스라엘 수교 문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얼마나 양보하는지에 달렸다면서도 “누가 책임자가 되든 이스라엘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마스의 이스마일 하니야 대표는 가자 전쟁을 촉발한 지난 10월7일 이스라엘 공격 직후에 “당신들(아랍 국가들)이 이들과 서명한 모든 관계 정상화 합의는 (팔레스타인)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다”고 말해, 사우디-이스라엘 수교 저지를 염두에 둔 것임을 밝혔다. 가자 전쟁 발발로 중동에서 이스라엘 비난 여론이 급등하자, 사우디는 미국에 이스라엘과 수교 협상 중단을 통보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 등이 보도했다.

난항을 겪던 이란과의 핵협상 역시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이 가자 전쟁 발발로 하마스를 지원하는 이란과의 대결을 을러대는 상황에서, 이란이 핵협상을 진전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 특히, 이란은 지난 3월 초 중국의 중재로 사우디와 전격적으로 국교를 회복하고는 수니파 친서방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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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급해진 미국·이스라엘

가자 전쟁이 발발하자, 이란의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교장관 및 유엔대표부는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와 대량 학살이 즉각 중단되지 않는다면 중동은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달을 것이라며, 자신들의 개입 가능성을 열어뒀다. 전쟁 직후엔 이스라엘과 접경지역에서 충돌한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전면에 나설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접경한 헤즈볼라가 나선다면 압도적 군사력을 가진 이스라엘이 차제에 가자 전쟁을 레바논으로까지 연동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멘의 안사르 알라가 이스라엘 타격에 선봉장으로 부상했다. 홍해에는 2천㎞나 떨어진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미치지 못하는데다, 국제 물류를 위협해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이미 세계 10대 해운회사 대부분과 메이저 석유회사인 비피(BP)가 홍해 항행 중단을 밝혀, 유가와 화물 운임이 들썩이고 있다.

안사르 알라로서는 일석이조의 효과다. 차제에 중동에서 반이스라엘 투쟁을 명분으로 자신들의 지위와 정통성, 홍해 및 바브엘만데브해협에서 영향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사르 알라는 이슬람권에서 소수 종파인 시아파 내 분파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안사르 알라는 미국의 ‘번영 수호자 작전’ 발표 직후 홍해에서 공격을 더 강화하겠다고 다짐했다. 미국 주도의 다국적 해상연합군이 안사르 알라에 군사적 보복을 가할 수는 있으나 일회성에 그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예멘 내전에서 사실상 승리한 안사르 알라를 무력화하려는 공격은 홍해를 장기적인 전쟁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영 수호자 작전’에 중동에선 바레인을 제외하고는 어떤 국가도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지 않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번영 수호자 작전의 발표와 때맞춰,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을 이스라엘에 보내 가자 전쟁에서 민간인 공격을 줄이고 휴전하라고 압박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인질 교환을 위한 일시적 휴전을 할 수 있다고 시사했으나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먼저 휴전해야만 인질 석방 협상을 할 수 있다며 배짱을 튕기고 있다. 가자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신호들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에서 국제 분야 글을 쓰고 있다. 신문에 글을 쓰는 도중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 ‘지정학의 포로들’ 등의 책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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