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곤처럼,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게 [주기율표 위 건강과 사회]
원소기호 18번 아르곤(Argon)은 프리모 레비가 쓴 책 〈주기율표〉 첫 장의 주인공이다. 그는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에 정착한 유대인, 그의 선조들이 아르곤과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한다. “공통적으로 정적인 데가 있고, 품위 있는 절제의 태도, 큰 강처럼 흐르는 삶의 대열 변두리로 자발적으로 물러서는 태도”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감은 유럽의 다른 유대인 공동체들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선조들의 이런 성격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들로 첫 장을 채운다.
이는 내가 가져왔던 아르곤의 심상과는 많이 다르다. 내게 아르곤의 연관검색어는 ‘현대’였고, 떠오르는 이미지는 ‘죽음’이었다. 2020년, 현대중공업 LNG 운반선에서 배관 용접 보조작업을 하던 하청노동자가 사망했다. 용접 작업을 할 때 산소를 차단하기 위해 아르곤 가스를 채워두는데, 환기가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자가 들어갔다가 질식한 것이다. 당시 뉴스를 보고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어? 이 사건 이미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찾아보니 날짜만 가린다면 같은 사건으로 착각할 법한 일이 2012년에 있었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가 용접 부위를 점검하러 배관 안에 들어갔다가 아르곤 가스에 질식해 숨진 사건이었다. 아닌데, 분명히 여러 명이 돌아가셨던 것 같은데? 다시 검색해보니 중공업이 아니라 제철이었다. 2013년 5월,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에서 전기로 보수공사를 하던 노동자 5명이 한꺼번에 아르곤 가스에 질식해 숨진 일이 있었다. 당시 현대제철은 두 달 전 노동자 추락 사망사고 때문에 노동부 수시 감독을 받은 직후였다. 색깔과 냄새가 없고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독성도 없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르곤 가스는 하청노동자들에게 유독 가혹했다. 왜 이런 일이 잇따라 일어났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을 소홀히 취급하고, 위험한 업무는 하청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그러다 산재가 발생하면 솜방망이 처벌만 견디면 되니까. 사실 아르곤은 죄가 없다.
움직임이 없다, 게으르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아르고스(argos)에서 이름을 따온 아르곤(Ar)은 주기율표에서 헬륨(He), 네온(Ne), 크립톤(Kr), 제논(Xe), 라돈(Rn) 등과 함께 비활성 기체(noble gas)로 분류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화학 반응성이 낮고 다른 원소와 잘 결합하지 않는다. 헬륨을 제외하면, 가장 바깥쪽 전자 궤도에 정원을 딱 맞춘 전자 8개가 들어가 있어 굳이 다른 원소와 전자를 주고받으며 반응할 이유가 없다. 프리모 레비의 비유적 설명처럼 항상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해 있는 셈이다. 아르곤은 우주에서 약 12번째로 풍부하고 대기 중에서 세 번째로 흔한 원소이지만, 이러한 비활성 특성 때문에 고대 금속인 납이나 수은과 달리 189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그나마도 비활성 기체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발견된 것이다.
아르곤의 산업적 활용도는 높다. 반응성이 낮고 안정되어 있으며, 자연계에 풍부하고 생산비용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산화나 연소가 일어나면 안 되는 상황, 대표적으로 아크 용접에서 산화를 방지하는 차폐 가스로, 전기 고로에서 흑연이 연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쓰인다. 산소나 습기에 의한 부식을 예방할 수 있기에 식품 포장의 완충재나 중요한 문서 보관에도 활용된다. 이를테면 미국 국립보관소는 독립선언문과 헌법 같은 역사적 문서를 아르곤으로 채운 케이스에 보관하고 있다. 아르곤 자체는 독성이 없지만 공기보다 무겁기 때문에 산소를 가라앉혀 질식을 초래할 수 있으며 이런 특성을 이용해서 가금류 농장에서 조류를 폐사시킬 때 사용하기도 한다. 색이나 냄새가 없기 때문에 별도의 측정장치가 없다면 공기 대신 아르곤 가스가 차 있다는 것을 사람이 알아챌 수 없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제철의 하청노동자들이 사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이 미치는 영향
친애하는 작가에게는 결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다른 원소는커녕 같은 원소끼리도 좀처럼 결합하지 않는 아르곤은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점잖은 유대인보다는 오늘날의 원자화된 현대인을 상징한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사실 고립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토록 자극이 많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고독은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호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고독은 홀로 있되 외롭지 않은 상태를 지칭하며, 고독의 시간에 자기 내면에 대한 탐색과 성찰, 자아의 성장이 가능하다. 무언가에 몰두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양한 종교,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고독을 찬양하고 갈구해왔다. 나이가 들어보니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친구를 덜 만나고 자신의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김영하 작가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외로움은 우리가 가진 사회적 관계의 질과 양이 우리가 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홀로 있되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얼마든지 외로울 수 있다. 다른 포식자들에 비해 형편없는 힘과 민첩성을 가진 인류가 자연계에서 살아남고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회적 협동이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며, 고립과 외로움은 우리의 존재와 안녕을 위협한다.
일찍이 1897년,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률은 개인들이 그 일부를 구성하는 사회적 집단의 통합 정도와 반비례한다’는 결론을 남겼다. 한 세기가 흐른 1979년 〈미국 역학회지〉에 발표된 논문은 사회 네트워크가 사망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연구진은 1965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앨러미다 카운티의 주민 7000여 명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사회적 연결 상태를 조사하고, 이후 9년 동안 사망 여부를 추적했다. 분석 결과 사회적 유대와 지역사회 연결이 없는 남성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2.3배, 여성은 2.8배 사망률이 높았다. 사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위험 요인들을 고려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 관계는 우리 삶에서 다양한 역할을 한다.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고 물질적 도움과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며, 태도와 규범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과 금전적 대가가 따르지 않는 무수한 ‘교환’을 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또한 직장이나 학교만이 아니라 가족, 친교모임, 사회단체 같은 다양한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소속감을 가지며, 의미 있는 사회적 역할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간다. 그렇기에 사회적 고립이나 외로움은 부정적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무수히 많은 연구들이 외로움이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보고해왔다. 외롭다고 느끼는 것은 흡연이나 비만과 마찬가지로 조기사망과 관련되며, 관상동맥질환, 뇌졸중, 우울증, 인지 저하와 알츠하이머 치매 위험을 높인다. 그뿐 아니라 외로움은 타인의 행동을 호의적이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이는 사회적 불안을 높여서 더욱 위축되게 만들고 고립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사회적으로 거부당한다고 느낄 때, 우리 뇌에서는 신체적 고통을 경험할 때와 비슷한 반응이 촉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적 고립이나 외로움 문제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흔히 고독사, 독거노인, 고립된 1인 청년 가구를 떠올린다. 국내의 실태조사나 정책 개입도 대개 이러한 사례들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를테면 서울시의 2020년 ‘1인 가구 실태조사’는 서울시 1인 가구 중 외로움 경험 비율이 62.1%, 사회적 고립 비율 13.6%,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동시에 겪는 비율이 12.8%라고 보고했다. 소득이 월 100만원 미만인 1인 가구는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동시에 겪는 비율이 18.1%로 더 높았다. 한편 서울시복지재단은 고독사 문제를 꾸준히 추적해왔다. ‘단절된 채로 혼자 살던 사람이 질병, 자살 등으로 사망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발견된 죽음’을 지칭하는 고독사는 사회적 고립의 극단을 상징한다. 장제급여 수급자료, 무연고 사망자료, 고독사 동향 보고 자료를 종합하여 확인한 2021년 서울의 고독사 사례는 1139건인데, 이 숫자는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을 경험하는 이들의 극소수만을 보여줄 뿐이다. 실제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1년 연구는 ‘타인과 유의미한 교류가 없고 곤란한 일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지지 체계가 없는’ 고립 인구가 전국적으로 약 280만명이라고 추정했다.
영국 정부가 ‘외로움’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
하지만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은 1인 가구나 취약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로움 의제의 최전선에 선 영국 정부가 2018년에 발행한 정책보고서 〈연결된 사회(Connected Society)〉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는 다양한 상황을 일러스트로 보여주었다. 펼쳐진 두 쪽에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10대들의 또래 압력, 이직이나 실직, 은퇴, 낯선 곳으로의 이사, 자녀의 독립,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혼이나 관계의 파탄, 차별의 경험, 건강 악화, 범죄 피해자가 되었을 때, 장애를 가지고 살아갈 때, 부모가 되거나 돌봄 제공자가 되었을 때 같은 다양한 상황이 그려져 있다. 누군가는 사랑스러운 아기가 태어났는데, 가족을 돌보며 내내 함께 있는데 무슨 외로움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로 자신에게 의존적인 존재를 온전히 책임지는 것만큼 외롭고 어려운 일도 드물다. 여기 언급된 상황들은 특별한 소수에게만 일어나는 유별난 일이 아니라 생애과정 어느 지점에선가 누구나 한 번쯤 직면하게 되는 것들이다. 물론 외로움이나 사회적 고립의 감각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고, 정부 정책으로 외로움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지역사회 지지 체계를 만들고, 의미 있는 사회적 참여와 연결의 기회를 촉진하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영국 정부가 이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외로움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조화되며 중요한 공중보건 문제가 되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노동과정, 고용 형태의 변화는 일터의 모습만 바꾼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도 바꾸어놓았다고 지적했다. 일터에서의 신뢰, 충성, 상호 헌신 같은 가치들은 고루한 개념이 되었고, 단기 성과와 과업 중심의 ‘헤쳐모여’는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지속 가능한 자아의 의식을 간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신뢰라는 미덕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곳, 사람들이 일회용품처럼 취급받는 곳에서 무관심은 확산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르곤에 질식당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아르곤이 되어 홀로 부유하는 삶으로 이행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개인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리처드 세넷은 “우리가 왜 인간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지 그 소중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못하는 체제라면 자신의 정통성을 오래 보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독을 향유하지만 외롭지 않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체제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