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좀 잘 씁시다 [세상에 이런 법이]
A는 어렵게 모은 돈에 은행 빚을 더해 건물주가 되는 꿈을 이뤘다. 병원이나 카페가 들어와서 넉넉한 임대료를 받으며 건물 가치까지 올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오랜 꿈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마침 이쪽 일에 경험이 많아 보이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접근해 왔다. 그는 인테리어 공사부터 할 것을 권했고 공사 업체도 소개해주었다. 적절한 세입자도 찾아주겠다고 약속하며, 일반적인 중개수수료 외에 컨설팅비 명목의 돈을 따로 요구했다. 계약서는 따로 쓰지 않았다. 그는 A에게 “이런 일에는 따로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것이 관행”이라고 했다.
B는 회사를 운영하며 전문기술 인력을 채용하고자 했다. 이른바 헤드헌터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적정한 인물 소개를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계약서를 내밀고 서명하도록 했는데, 그 내용이 좀 이상했다. 관련 자격과 경험을 갖춘 인물이 B와 면접을 보게 하는 것만으로 꽤 많은 돈을 지급해야 했고, 채용까지 이루어지면 연봉의 일부를 별도로 지급해야 했다. 채용된 사람이 필요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게 나중에 확인되어도 책임을 묻기 어려운 계약이었다. B가 계약서의 그런 문제를 지적하자, 그는 “이것이 ‘업계 표준계약서’다”라고 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이렇듯 많은 돈이 오가는 거래를 하면서 계약서를 아예 쓰지 않거나 상대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만 해서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꽤 많다. A는 소개받은 업체를 통해 인테리어 공사를 마쳤지만, 그 완성도가 좋지 않았고, 적정한 세입자를 소개받지도 못해 오랫동안 은행 이자만 계속 부담하고 있었다. B는 소개받은 인물이 원하는 실력을 갖추지 못한 데다 업무 중 큰 실수까지 범해 손해를 보고 말았다.
하지만 A와 B 모두 상대방에게 이미 지불한 돈을 돌려달라고 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안타깝게도 계약서를 쓰지 않은 잘못, 혹은 이상한 계약서에 서명한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언컨대, 상당한 액수의 돈이 오가는 거래에서 계약서를 쓰지 않는 ‘관행’은 없다. 돈을 받고도 약속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려는 마음, 혹은 약속한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해도 자신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이 종종 관행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표준계약서’라는 말도 조심해야 한다. 공공기관이 만드는 표준계약서에는 양측의 입장이 공정하게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공공기관 흉내를 내는 각종 이익집단(대개 ○○협회라 불리는)이 만들어서 배포하는 계약서들은 표준계약서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 뿐, 그 집단의 이익에만 충실하게 작성된 경우가 많다.
무늬만 ‘표준계약서’
분쟁 처리에 돈을 쓰기보다는 분쟁 예방에 돈을 쓰는 것이 훨씬 이롭다. 대개 예방 비용이 처리 비용보다 훨씬 적고, 분쟁 처리 과정에서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분쟁 예방을 위한 대표적 수단이 ‘계약서 잘 쓰기’다. 좋은 계약서란 양 당사자가 합의한 내용이 정확하게, 최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가 남지 않는 명료한 용어로 정리된 문서를 뜻한다. 단단하게 잘 쓰인 계약서는 재판에서 아주 힘이 세다. 소송으로 가더라도 그 결과가 뻔히 예측되게 하고, 그래서 소송 자체를 단념하게 만든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법률상담을 할 때,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들여서라도(정확하고 명료한 계약서를 얻기 위해서도 변호사 비용이 든다) 계약서부터 잘 쓸 것을 많이 권한다. 그것이 훗날 부담하게 될 엄청난 비용을 아끼는 방법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직 한국 사회에 그러한 인식이 잘 없어서 불필요한 분쟁이 자꾸 생긴다. 그러면 변호사들에겐 좋은 일 아니냐고? 변호사 입장에서도 분쟁 예방에 조력하는 편이 훨씬 낫고, 이상하게 쓰인 계약서 들고 싸우는 상황은 결코 편치 않다. 그래서 다시 말한다. 계약서 좀, 잘, 쓰자고.
임자운 (변호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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