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니라 ‘똥가부장제’ 때문에···“사랑을 재발명하라”[책과 삶]

임지선 기자 2023. 12. 23.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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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여자’ ‘성냥개비 같은 손목’ 잡지·소설 속 묘사
낭만적 사랑이 ‘사회체계 영향’이란 점 짚어내
가부장제 탈피가 관계 새롭게 맺는 시작
심리적 변화가 곧 정치적 변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는 도빌에서 부인 카를라 브루니 여사를 부축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프랑스 대중 잡지 ‘파리 마치’는 2019년 표지에서 사르코지를 카를라보다 키가 커보이게 사진을 찍었다. ‘파리 마치’ 홈페이지

사랑을 재발명하라

모나 숄레 지음 |백선희 옮김|책세상|344쪽| 1만8800원

2019년 프랑스의 대중잡지 ‘파리 마치’의 표지는 니콜라 사르코지와 카를라 브루니 커플이 장식했다. 사르코지는 전직 톱모델 카를라보다 키가 크게 나왔다. 실제론 카를라의 키가 더 큰데도 말이다. 당시 유럽에서 조롱을 받자 해당 잡지는 사진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단지 사르코지가 한 계단 높은 곳에 섰을 뿐이라고 했다. 위선적 해명이었다. 사진은 명확히 남성 권력자의 모습이 더 커 보이게 만든 구도였다.

프랑스의 인기 작가 모나 숄레의 ‘사랑’에 관한 통속적인 생각을 한 꺼풀 벗겨낸 에세이 <사랑을 재발명하라>가 국내에 출간됐다. 그의 전작 <마녀>는 서구인들 눈에 비친 마녀를 인문학적이며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에세이였다. 2018년 프랑스에서 40만부 이상 팔렸으며 128주 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는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프리랜서 기자일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미개인’으로 묘사한 당시 편집장에 맞서다 계약 파기 통보를 받기도 했다.

<사랑을 재발명하라>에서 저자는 사랑에 관한 관념 대부분이 개인의 선택이고 취향의 영역이라지만 알고 보면 모두 가부장제하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파리 마치’의 표지처럼 말이다. 숄레는 책에서 여러 드라마, 영화, 소설 그리고 대중매체에 등장한 이야기들을 한데 엮어가며 사랑에 관한 우리의 꿈과 환상을 깨뜨린다. 가부장제가 어떻게 사랑을 망가뜨리는지 보여준다. 저자의 자전적 경험도 담겨 있다. 그는 이 책이 “나의 뒤죽박죽인 개인적 감정에서 탄생했다”며 “이러한 장애물들을 해체하고, 훨씬 성숙한 관계를 맺기 위한 구슬들을 모든 남녀에게 제공하려는 갈망에서 탄생했다”고 전한다.

<사랑을 재발명하라>의 저자 모나 숄레. (C) Mathieu Zazzo

책에 등장하는 콘텐츠는 고전부터 현대까지 광범위하다. 고전에서는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사랑에 관한 신화를 들춰 현대까지 연결시킨다. 요즘 콘텐츠에서는 여전함을 답답해하면서도 조금은 달라진 면모도 짚어간다. 저자는 1968년 알베르 코엔의 소설 <주군의 여인>에 담긴 사랑의 낭만주의적 표상부터 꺼낸다. 제목부터 남성은 주군이고 여성은 그의 여인이다. ‘주군’ 솔랄과 ‘여인’ 아리안은 서로 차려입은 모습만 보여준다. 아리안은 솔랄과 함께할 때 예기치 못하게 꾸르륵 소리라도 날라치면 질겁하고 방에서 달아난다.

저자는 2017년 영국에서 일어난 웃지 못할 실제 사건도 말한다. 영국의 한 젊은 여성이 남성의 집에서 볼일을 봤다. 변기의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그녀는 똥덩이를 창문 밖으로 던지려고 했지만 그것은 창틀 사이에 떨어졌다. 그녀는 똥덩이를 꺼내려다 창문틀 사이에 끼었다. 소방관이 출동했고, 남성은 창문 수리를 위해 크라우드펀딩 캠페인을 벌였다. 저자는 “여성은 일종의 여신으로 내장도 창자도 없고, 엉덩이 사이에 장미 꽃봉오리를 단 요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건 ‘똥가부장제’의 잘못”이라고 일갈한다.

책은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등 고전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성냥개비 같은 손목” “말벌처럼 가냘픈 여성” 등 오래된 묘사도 꼬집는다. 1980년대 여성 보디빌딩 대회에서도 여성은 ‘남성적 근육’이 아니라 ‘여성적 근육’을 요구받은 이야기, 미학을 구실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검열 이야기도 한다. 2015년 테니스 선수 세리나 윌리엄스는 너무 강해 보이는 신체 때문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성차별적 인종차별 욕설을 감내해야 했다.

저자는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에서 보여준 브리엔 타스라는 인물을 통해 달라진 면모도 읽어낸다. 타스는 큰 키와 다부진 체격, 짧은 금발 머리의 여전사다. ‘여성은 기사가 될 수 없다’는 전통을 깨고, 옛 지휘관이 그녀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사를 나눈다. “그는 그녀에게 욕망을 드러내면서도 그녀를 동등한 전사로 인정한다.”

한국 사회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통하는 ‘여성이 너무 빛나지 말라’는 선입견이 있다. 사회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성공하면 남녀관계가 유지되기 힘들다는 그 이상한 말들이 ‘오스카의 저주’를 통해 되풀이된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오스카상을 받은 배우들의 결혼은 평균 4.3년 동안 이어지고 상을 받지 못한 여배우 평균 결혼기간은 9.5년”이라는 것. 핼리 베리, 케이트 윈즐릿, 샌드라 불럭 등의 이야기다.

최근 아마존 프라임에서 방영된 미국 드라마 <마블러스 미시즈 메이슬>은 ‘잘나가는 여성’을 향한 편견을 깨부수는 사례로 나온다. 1950년대 말 미국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꿈꾸는 남편에 맞춰주며 살던 여성이 스탠드업 코미디에 재능을 발견하고 유명해지는 이야기다. 결국 둘은 이혼했지만 둘 사이는 점점 더 평등해지고 다시 만나기도 하는 사이가 된다.

저자는 여성들에게 흔하게 내재하는 통념도 파고든다. “나는 시계를 차지 않았고, 그는 시계를 찾고 있었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의 한 문장이다. 저자는 사랑에 관한 불균형의 모든 것을 담은 한 문장으로 꼽았다. 여성은 사랑에 모든 것을 걸지만 남성에게 사랑이란 자신의 일 중 하나라는 통념을 집대성한 문장인 셈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나는 어린 보바리 부인이었다”며 한 남성에게 절대적으로 기댄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저자는 의존할 수 없었던 다른 남성을 만나면서 ‘의존의 흔적’을 자각하며 사회학자 소냐 다양 에르즈브렁의 말을 인용한다. “대부분의 여성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조건, 그들이 듣거나 읽는 담론들, 그들이 보는 이미지들 등이 누가 그들을 사랑할지 기대하게 하고, 그 기대가 그들의 삶에 리듬을 붙이고, 그 기적 같은 남자의 사랑에서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 인격체로서의 정체성,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기대하도록 이끈다.”

저자는 남성에게도 조언을 건넨다. 영국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서 아둔해 보였던 애덤이 “너는 살아 있으니까”라는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과감하면서도 솔직하게 자신의 사랑을 밝히는 대목을 변화의 한 지점으로도 꼽는다. 다만 ‘전통적 틀’을 흔드는 남성들을 향한 떠들썩한 여론은 경계한다. 2019년 키아누 리브스는 나이 지긋한, 그보다 고작 아홉 살 밖에 어리지 않은 어린 46세 백발의 여성과 사귄다고 알려졌다. 여론은 스타의 남자다운 용기에 호들갑이었다. 저자는 “한 남성이 그저 여성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이유로 그를 칭찬하게 되는 현실이 문제임을 인정해야만 한다”며 “용맹한 기사들의 상대적 희귀성은 역설적으로 훨씬 더 큰 힘을 그들에게 부여해주고 남성의 시선과 선한 의지에 여성을 더더욱 묶어놓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가정폭력의 메커니즘도 비정상이나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을 통해 남성과 여성에게 처방된 논리적 행동 결과라고 지적한다. 남성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살해한 수많은 사건을 과거 언론이 ‘치정범죄’라고 불렀던 역사도 지적한다. 단지 “여성 살해” 범죄일 뿐인데도 말이다.

저자가 여러 사례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각자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자립을 하고 목소리를 내고 “사랑을 재발명하라”는 것. 그것이 관계를 새롭게 맺는 출발점이다. 심리적 변화는 곧 정치적 변화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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