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몰디브’에서 시작한 길 위의 여행 [ESC]
쿠알라룸푸르서 화려한 하룻밤
7시간 걸려 도착한 조용한 섬
아름다운 해변 외길 따라 걷기
“쿠알라룸푸르의 밤을 보여줄게!” 남북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시내로 들어서는 차창으로 도시의 오색찬란한 불빛이 번쩍거렸다. 고가차도 양쪽으로 늘어선 빌딩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아래 빼곡하게 들어선 작은 건물들은 이에 질세라 사방으로 네온사인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63빌딩이나 롯데타워 규모의 빌딩이 족히 수십 채는 넘었다. 그 순간 사진으로만 보던 쌍둥이 빌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높이 452m에 지상 88층의 말레이시아 랜드마크다.
유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의 여자친구 제시와 내가 도착한 곳은 쿠알라룸푸르의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거실의 통유리창으로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를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집이었다. 유진은 한국에서 방문한 나를 위해 숙박 공유 서비스로 운영 중인 이 집을 하룻밤 대여했다고 했다. 감동할 새도 없이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밤 10시의 거리는 대낮 같았다. 흥에 취한 사람들은 많이 웃었고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우리도 쭈뼛대며 클럽에 들어가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2023년 3월, 말레이반도와의 첫 만남은 강렬했다.
덜 알려진 ‘아름다운 섬’
간밤의 음주가무로 인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우리는 오전 7시에 기상해 다시 차를 타고 쿠알라룸푸르를 벗어나 말레이반도 남동쪽의 작은 해안 마을 머르싱으로 향했다.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에서 부산 거리. 이곳 항구에서 오후 4시쯤 티오만으로 출항하는 여객선을 타야 했다. 물때에 따라 하루 한 번 배가 나가기에 시간을 잘 맞춰야 했다. 넉넉히 여유를 두고 도착한 우리는 한참을 부두 근처에 앉아 바닷가에 물이 차는 것을 바라봤다.
티오만은 말레이반도 남동쪽 해안에서 약 50㎞ 떨어진 조용한 섬이다. 원시의 때 묻지 않은 자연경관 덕분에 ‘제2의 몰디브’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1970년대 ‘타임’이 선정한 ‘세계 10대 아름다운 섬’에 들기도 했다. 분위기는 평화롭고 한적하나 남중국해의 64개 화산섬 중에서는 가장 크고 발전된 섬이라 휴양을 즐기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말레이시아는 물론 싱가포르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이점도 티오만의 매력이었다. 그럼에도 티오만은 말레이시아의 다른 휴양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도 나에게는 매력이었다.
티오만은 유진의 제2의 고향이었다. 사람에게 태어나 자란 곳이 제1의 고향이라면 제2의 고향은 영혼의 안식처 같은 곳일 것이다. 유진은 이 섬에서 뛰어놀며 보낸 유년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유진은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울트라 트레일러너로 오랜 세월 달려왔다. 현재는 말레이시아에 트레일러닝 대회를 만드는 ‘레이스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으나 그는 산에서 먹고 자며 긴 거리를 달리는 시간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오죽하면 런던대 법대 출신의 국제변호사라는 번듯한 직업도 포기했을까.
우리를 태운 배가 티오만의 선착장에 들어선 시각은 저녁 7시 무렵이었다. 배는 섬의 세 군데 선착장에 들러 사람들을 내려줬다. 우리는 그중 가운데 선착장인 캄퐁 에어 바탕 마을에 하선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차를 타고 머르싱까지, 머르싱에서 배를 타고 티오만까지 도합 일곱 시간이 걸렸다. 쿠알라룸푸르 수방공항에서 티오만까지 직항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만에 도착한다는 사실은 섬에 도착한 뒤 제시가 말해줘서 알았다. 길 위의 여행을 즐기는 이들에게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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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좁은 길
유진과 제시와 함께 섬에 발을 딛자 선착장 입구에서 초로의 남자가 수레가 딸린 사륜 바이크를 세워두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흡사 구루인 것처럼 가슴팍까지 기른 하얀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를 환대하던 그는 자신을 ‘제프’라고 소개했다. 유진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깊게 포옹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알고 지내며 부자지간처럼 친해진 친구 사이였다. 일흔 살이 넘은 제프는 가족과 함께 티오만에서 살며 식당과 숙소를 운영한다고 했다. 제프의 숙소는 티오만에서 우리가 나흘 동안 머물 곳이기도 했다.
사륜 바이크에 성인 네 사람이 타기는 무리라서 수레에 배낭만 간신히 싣고 우리는 숙소까지 산책 삼아 걷기로 했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사위는 어스름했고 감상하려던 바다도 어둠 속에 완전히 잠겨버렸다. 하지만 작은 집과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영롱한 빛이 호롱불처럼 가는 길을 비춰줬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우쿨렐레 소리에 발맞춰 천천히 걸었다. 바야흐로 봄날의 파라다이스였다. 문득 쿠알라룸푸르 거리에서 보낸 화려한 지난밤이 떠올랐다. 대도시의 한복판에서 하루 만에 이슥한 시골 섬 구석으로 넘어오다니. 감개무량했다.
제프가 안내한 작은 방에 들어가 형광등을 켜는 순간 도마뱀 한 마리가 순식간에 갈라진 벽 틈새로 자취를 감췄다. ‘익충’(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곤충)이라지만 여간해서는 적응이 안 되는 초록뱀의 출현에 놀란 가슴을 쓰다듬으며 새삼 동남아에 왔음을 실감했다. 눅눅한 침대 위로 고단한 몸을 던졌다. 천장에 매달린 실링팬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위로했다. 반쯤 열어둔 문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티오만에서의 첫날 밤은 한 번도 깨지 않고 잠들었다.
이튿날에는 현지 친구 아즈리도 합류해 섬을 종주하기로 했다. 간단히 채비하고 아침 9시, 섬의 남쪽 끝을 향해 출발했다. 외길이었고 해변을 따라가면 되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티오만의 특징이 있다면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좁은 보행로는 사람과 개, 코모도드래곤(큰 도마뱀의 일종), 바이크 정도만 다닐 수 있었고 먼 거리는 수상택시(배)를 타야 했으나 그마저도 배를 댈 수 있는 곳이나 가능했다. 믿을 것은 자신의 두 다리밖에 없는 셈. 배수진을 치고 기세 좋게 걷고 달리는 네 개의 정수리 위로 남국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꽂혔다.
장보영 등산여행가
스물다섯 살에 우연히 오른 지리산에 매료된 이후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시아의 여러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을 달리기 시작했고 산악 잡지도 만들었다. 지은 책 ‘아무튼, 산’은 산과 함께한 청춘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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