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 난 채 불태워진 막내딸…범인이 '인간' 아니라 '신'이라니 [책과 세상]
여기 신을 죽인 여자들이 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에 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 사르다 가족 세 자매의 이야기다. 때로는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또 때로는 서로를 죽일 듯 미워하던 자매는 막내 아나가 불에 탄 토막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산산조각 난다. 장녀 카르멘은 ‘영원히 기억될 가톨릭계의 여성들’ 중 한 명이 되기를 원하며 신앙에 몰두한 반면 둘째 리아는 무신론자가 되어 가족을 영원히 떠난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여성 인권 활동가인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장편소설 ‘신을 죽인 여자들’은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잔인하게 살해된 여성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풀어가는 추리·스릴러로 분류되지만, 범죄 소설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다. 2021년 그해의 최고 범죄 소설에 주는 대실해밋상 수상작으로 결정될 당시 “일반적인 대실해밋상 수상작은 아니었다”(후란 카를로스 갈린도 문학비평가)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다.
"하느님 없이, 저들만의 대성당을 짓는 이들에게"라는 서두로 문을 여는 이 소설은 아나의 죽음을 파헤치는 구성으로 전개되면서도 죽음의 이유를 숨기는 대신 누구나 짐작하도록 단서를 흘린다. 그렇다고 맥이 풀리진 않는다. 서사의 출발점은 추리 소설의 백미로 여겨지는 범인 찾기가 아니라 죽은 아나를 바라보는 주변인의 태도다. 누군가는 죄책감을 느끼고 후회하며 괴로워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17세 소녀의 시신을 참혹하게 훼손한 범죄를 “최대의 악을 막는 ‘사소한 악’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귀염둥이’ 막내는 왜 죽어야 했나
소설은 동생의 죽음 이후 아르헨티나를 떠나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리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리아는 가족 중 유일하게 편지로 교류하던 아버지 알프레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는다. 또다시 덮친 상실의 슬픔에 어쩔 줄 모르던 그의 앞에 존재도 몰랐던 카르멘의 아들, 즉 조카인 마테오가 나타난다. 지난 30년 동안 홀로 막내딸을 죽인 범인을 추적해 온 알프레도의 편지를 들고서.
리아에 이어 마테오와 카르멘, 카르멘의 남편 훌리오, 아나의 친구 마르셀라, 아나의 사건을 수사한 엘메르, 알프레도 등이 차례로 화자가 되어 아나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집요하게 묻고 대답한다.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 알프레도는 말한다. “나는 우리가 각자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 진실까지만 도달한다고 믿는단다.”
알프레도의 말은 ‘회개로 구원받으리라는 신의 약속은 그 어떤 죄악에서도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아나를 살해하는 참혹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하느님은 순수한 자비이시며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신다”는 ‘주의 말씀’을 방패 삼아 무고함을 주장하는 이들을 통해 소설은 신앙으로 진실을 재단하는 위선을 낱낱이 폭로한다. “(아나를 죽인 건) 하느님의 뜻이었다. 특히 이번만큼은 하느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다”는 광신적인 신앙은 아나와 또 다른 여성들의 살해에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신의 형벌'이라는 면죄부를 부여한다.
‘여성 정책’ 역행 아르헨티나 고발하는 스릴러
피녜이로는 종교적 신념을 근거 삼아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제에 대한 고발을 스릴러라는 장르에 녹여냈다. 전작 ‘엘레나는 알고 있다’를 비롯해 그의 소설은 범죄를 통해 사회의 모순을 그려낸다. 어떤 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에는 그 사회가 지닌 문제점이 집약되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가톨릭이 국교인 아르헨티나의 가톨릭교회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설 속 리아처럼 아버지의 사망 이후 “신에 대한 경외를 그만뒀다”고 고백한 피녜이로는 아르헨티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톨릭교회는 이혼, 친권 공유, 평등한 결혼, 임신중지(낙태)에 반대해 왔다”고 문제 의식을 드러냈다.
아르헨티나에선 불법 임신중지 시술을 받다 사망하는 임산부가 속출했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시중지를 요구하는 운동인 ‘녹색 물결’ 캠페인을 비롯한 끈질긴 노력이 계속된 끝에 2020년 임신 14주 이내의 임시중지가 허용됐다. 그러나 지난달 ‘임신 중지권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건 극우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아르헨티나 여성들의 건강권은 다시 갈림길에 놓였다. “피녜이로의 소설은 빠르게 쇠퇴하는 사회를 향한 무자비한 분석”이라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추천사가 이 작품이 닿으려는 지점을 적확히 드러낸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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