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에 팔린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화가의 놀라운 비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스코틀랜드의 한 화가
별명은 '냉동 양고기'
조제프 파커슨 그림의 비밀
“15만7250파운드(약 2억6000만원)! 더 없습니까? 낙찰입니다!”
2013년 영국 런던의 본햄스 경매장. 경매사가 낙찰을 알리는 망치를 두드리자 경매장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이 탄생하는 순간을 축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소식은 서구에서 곧바로 큰 화제가 됐습니다. 누구나 크리스마스 때 한 번쯤은 본 적 있는 그림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림의 제목은 ‘겨울날이 짧아지고 있다’. 저녁 햇살이 비치는 눈 덮인 목장에서 양을 돌보는 양치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었습니다. 미국 최대의 카드 제조사인 홀마크가 1980년대 이 작품을 크리스마스 카드에 인쇄하기 시작한 뒤, 해당 카드는 수십만장 넘게 팔리며 ‘가장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 카드’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 이렇게 사실적으로 잘 그릴 수 있었던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진짜 전문가’가 그렸거든요. 작가의 이름은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 조제프 파커슨(1846~1935). 그는 ‘눈 덮인 목장에 있는 양’을 그리고 또 그리며 평생토록 한 우물을 판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별명도 ‘냉동 양고기’. 이 남자는 왜 이런 특이한 주제를 그렇게나 많이 그렸을까요.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오늘은 파커슨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변방에서 온 신동
파커슨은 스코틀랜드 북동부 지방 영주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파커슨의 아버지는 영주이면서도 의사여서 경제적으로 넉넉했습니다. 그림도 좋아하고 잘 그려서, 따로 그림을 그리는 스튜디오를 갖고 있었지요. 어린 시절 파커슨은 매주 토요일마다 그 스튜디오로 달려가 그림을 그리며 놀곤 했습니다.
소년 파커슨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건 열두 살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로 캔버스와 물감을 비롯한 그림 도구 세트를 받은 게 계기였지요. 이제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파커슨은 주변에 있는 것들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후, 그는 고작 15살의 나이로 스코틀랜드 최고의 미술 전시에 자신의 그림을 거는 신동이 돼 있었습니다.
그 후 파커슨은 엘리트 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20대의 나이에 런던이라는 ‘큰물’로 건너가 전업 화가로 활동하면서 차츰 명성을 얻었고요. 30대 초반인 1880년대 초반에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훌륭한 스승(카롤루스 뒤랑)에게 많은 것들을 배웠지요. “붓을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 형태와 색채를 언제든 염두에 둬야 해.” 그의 가르침은 파커슨의 작품 속 색과 모양을 풍부하게 만들어 줬습니다.
30대 중반이던 1885년 그는 북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북아프리카의 풍경을 그리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그 분위기를 타고 일종의 ‘그림 수행’을 떠난 거지요. 여행지에서 그는 이집트의 유적들을 그리고, 거리 풍경을 그리고, 사람을 그렸습니다. 눈이 부신 태양과 건물 지붕 밑의 짙은 그림자를 한 캔버스에 담는 법도 배웠습니다. 빛과 색채를 표현하는 그의 재능은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서도 주목받았고, 어느새 그는 스코틀랜드를 넘어 영국을 대표하는 젊은 화가 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이제 스타가 될 준비는 끝났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막 유행하기 시작한 반(半)추상적 그림이든, 예쁘고 잘 팔리는 라파엘전파의 그림이든, 그 어떤 그림을 그리더라도 파커슨은 미술계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커슨은 뜻밖의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화가라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고흐라면 해바라기, 모네라면 수련, 세잔이라면 사과 같은 것들요. 파커슨도 좋아하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고향 스코틀랜드의 광대한 자연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가 어떤 땅인지를 간략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곳은 영국 그레이트브리튼섬(본섬) 북쪽 3분의 1을 차지하는 지역입니다. 풍광은 아름답지만 거칠고 척박한 자연 탓에 세계를 호령한 로마 제국조차 정복에 실패한 곳이고요. 18세기 잉글랜드와 통일되기 전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환경 덕분이었지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지역의 특색과 정체성이 잘 남아있는 곳이고, 주민들의 고향 사랑이 큰 곳입니다.
파커슨도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땅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특히 그가 가장 좋아했던 건 눈 덮인 땅에서 사람과 동물이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파커슨에게 그 광경은, 자연이 주는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생명력의 상징이자 위대한 스코틀랜드인들의 기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이 풍경을 그려 고향 땅의 매력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당시 런던 미술계에서도 스코틀랜드의 풍경화는 꽤 인기가 있었으니, 해볼 만 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코틀랜드의 풍경은 어디까지나 산 좋고 물 좋은 아름답고 웅장한 풍경. 파커슨이 좋아하는 눈보라 치는 풍경은 별 인기가 없었습니다. ‘궁상맞은 촌구석의 일상 풍경’쯤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파커슨을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권유했습니다. “차라리 파리나 런던 풍경을 그려보면 어때요? 당신 실력이면 정말 멋진 작품이 나올 텐데….” 하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영주님 화가’, ‘얼린 양고기’라는 놀림을 받아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정말 잘 그리면, 내가 사랑하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모두 알아줄 거야.”
“풍경화를 그릴 땐 반드시 직접 보면서 그리겠다.” 파커슨의 ‘잘 그리기 위한 원칙’은 이랬습니다. 프랑스 유학 시절 본 풍경화가들의 영향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발견하면 먼저 땅에 말뚝을 박은 뒤 캔버스를 냅다 고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날씨와 시간대에만 작업을 했습니다. 완성될 때까지 작품은 야외에 계속 놔뒀고, 그림을 그리지 않는 시간에는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방수 천 등으로 캔버스를 덮었습니다. 문제는 스코틀랜드의 자연이 파리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는 것. 파리의 대단찮은 비바람과 달리 스코틀랜드의 눈보라는 캔버스를 흔적도 없이 덮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파커슨은 ‘이동식 작업실’을 고안했습니다. 작은 유리창과 난로가 있는, 바퀴 달린 나무 오두막이었지요. 그는 이런 시설을 여러 개 만든 후 여기저기 갖다 놓고 끌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오두막이 망가져서 죽을 뻔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파커슨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그는 눈보라 치는 스코틀랜드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생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직접 보면서 그리겠다’는 각오는 양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됐습니다. 다만 살아있는 양을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가만히 세워두기도 어려울뿐더러 자칫하면 양이 다치거나 죽을 위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양 모형’들을 특수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형들을 들판에 세워둔 후 오두막으로 돌아와 그림을 그렸지요. 이런 파커슨을 보고 “미쳤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점차 파커슨의 진심에 감화됐습니다. 기사 첫 부분에 나온 그림을 그릴 때, 파커슨은 ‘양치기 모델’을 고용해 실제로 눈밭에 세워 뒀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던 파커슨. 그런데 문득 모델의 얼굴을 보니, 안색이 파래져 있었습니다. “큰일이군. 빨리 들어와요! 몸을 녹여야겠어요.” 파커슨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모델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냥 지금 얼른 그림을 그리세요. 지금 이 날씨, 이 하늘은 다시 오지 않잖아요.” 파커슨의 열정과 ‘고향 사랑’에,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인이었던 모델도 감동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 만드는 특별함
어느새 하나둘씩 파커슨과 그의 작품을 칭찬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거친 스코틀랜드의 자연 속 생명들의 아름다움과 평온함, 그 광경이 주는 매력과 우아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커슨의 실력과 감동적인 열정 덕분이었습니다. 영국 왕립 아카데미는 파커슨을 정회원으로 승격시켰고, 몇 년 뒤엔 또다시 선임회원으로 등급을 높였습니다. 파커슨의 실력과 공로를 인정한 결과였습니다. “스코틀랜드 북동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성실하고 사실적으로 그 풍경을 그린 사람. 유행이나 사대주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남자.” 사람들은 파커슨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와 그의 작품은 스코틀랜드의 풍경과 하나가 되어 갔습니다. 세밀함만 놓고 보면 전보다 덜해졌지만, 그의 작품이 주는 인상과 전체적인 분위기는 더욱더 실제 자연과 닮아갔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에 이끌려 스코틀랜드를 찾아와 마음의 평온을 얻었습니다. 지난 수천년간 척박하고 별 볼 일 없다고 여겨졌던 풍경이, 애정을 담은 파커슨의 붓질로 마법처럼 피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겁니다.
이후 파커슨은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1935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꾸준히 그렸습니다. 그림을 팔아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기록물이 화재로 불타는 등 여러 불운이 겹친 탓에 사후 그의 명성은 생전만 못했지만, 그보다도 파커슨은 자신이 사랑하는 고향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는 사실에 기뻤을 듯합니다. 훗날 전 세계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마다 그의 그림을 보며 행복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욱 그랬겠지요.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려 합니다. 즐거운 연휴가 시작됐군요. 어떤 특별한 날이든, 사실 다른 날처럼 24시간인 건 똑같습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인간이 거기에 담은 의미와 사랑이 그 평범한 날을 특별하게 만드는 거겠지요. 파커슨이 스코틀랜드의 고향 풍경을 특별한 아름다움으로 만들었듯이요.
행복하고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이번 기사는 'Joseph Farquharson'(Francina Irwin 지음)을 중심으로 논문 'The Evolution of the Representation of Highland Landscapes by Scottish Painters between the Eighteenth and the Twenty-First Centuries'(Marion Amblard), 영국 왕립아카데미 역대 회원 정보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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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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