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어금니로 사는 나라’ ‘송곳니로 사는 나라’

강천석 기자 2023. 12. 23.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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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프라 개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보다 더디고 힘든 과제
한국은 지각생, 2024년 ‘舊정치’ 退出시켜야 나라가 거듭난다

송곳니를 주로 쓰는 나라와 어금니로 부지런히 씹어서 사는 나라가 있다. 송곳니가 군사력이라면 어금니는 경제 파워다. 핵무기·미사일 등 송곳니만 돌출(突出)한 나라 대표가 북한이다. 국가 자원을 송곳니 가는 데만 사용하는 나라는 단명(短命)할 수밖에 없다. 그 반대편에 중세 베네치아, 현대의 싱가포르·네덜란드·벨기에처럼 경제력 배양에 치중하는 첨단 산업 중심의 통상(通商) 국가가 있다.

정상(正常) 국가들은 송곳니와 어금니의 균형을 추구한다. 역사가 송곳니에만 의존한 나라는 가난을 벗기 힘들고 어금니 하나로 이룬 번영은 외부 침략을 부른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1600년대 중반에서 1700년 후반까지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던 자본주의 경제 대국은 네덜란드였다. ‘주식회사’ ‘주식시장’이 그곳에서 탄생했다. 해적(海賊)을 활용해 해군을 강화한 당시 영국은 100년 동안 4차례 전쟁을 벌여 네덜란드를 밀어냈다. 두 나라 해군 식단표(食單表)를 보면 네덜란드 졸병 메뉴가 영국 함장보다 호사스러웠다. 선군(先軍) 노선으로 경쟁 국가를 밀어낸 영국은 그 후 국가 전략을 바꿨다. 전성기 영국은 GDP 대비 국방 예산 비율이 가장 낮았던 패권 국가였다. 폭 35.4km 도버해협이 유럽 대륙에서 튀는 전쟁 불똥을 막아줬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기도 했다.

1991년 소련 붕괴 때 미국과 소련 군사력은 비슷했다. 그러나 소련 종합 국력(國力)은 높이 쳐도 미국의 60% 수준이었다. 이런 국력으로 미국과 대등한 송곳니를 유지하려 하다 경제가 왜곡되고 몰락을 앞당겼다. 중국은 과거 소련보다 까다로운 상대다. 형태야 어떻든 중국엔 시장(市場)이 존재하고, 시장은 경제의 과도한 왜곡을 막는 경고등(警告燈)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對)중국 정책이 냉전 시기 대소련 전략 정책과 다른 이유다.

한국은 75년 전 정부 수립 때 송곳니도 어금니도 없던 나라였다. 이제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와 그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가진 나라로 변했다. 한국은 어금니로 경제력을 기르고 송곳니론 그 체제를 지키온 나라다. 경제 통상 국가에 가까운 나라다. 통상 국가에는 그에 맞는 번영의 전략이 있다.

어느 중동 전문가도 2023년 새해 하마스 선공(先攻)으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터지리라고 예고하지 못했다. 2021년이 저물 무렵 내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侵攻)하리라고 내다본 전문가도 없었다. 1990년 새해 벽두 미국 신문 월스트리트저널은 ‘도쿄(東京) 주식시장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돈 벌 기회를 놓칠 것’이라고 호언장담(豪言壯談)했다. 두 달 후 도쿄 주식시장은 빠지기 시작해 2013년까지 23년 동안 폭락을 거듭했다.

이렇게 모든 예측이 빗나갈 때, 우리는 역사라는 숫돌에 벼려 상황 판단력을 날카롭게 다듬어야 한다. 역사는 다가올 위기를 미리 귀띔해 주진 못해도 위기 극복에 필요한 자세와 역량(力量)이 무엇인지 일러주기 때문이다.

1851년 세계는 제1회 런던 만국박람회가 영국 번영의 절정기(絶頂期)라며 감탄했다. 쇠락(衰落)의 씨앗은 이 절정에서 싹텄다. 훗날 영국은 이 순간부터 가라앉기 시작한 것으로 판명됐다. 강철과 화학의 시대 개막을 코앞에 두고 두 분야 선두를 독일에 빼앗긴 것이다. 거듭된 경고에 정치권과 대중은 귀를 닫았다.

1948년 이후 한국이 지금처럼 부강(富强) 부유했던 시대는 없었다. 여러 면에서 초일류 국가와 아직 격차가 크다 해도 이 사실은 부인하지 못한다. 지금이 절정이라면 영국 역사에서 보듯 대한민국 바닥 여러 곳에서 이미 대형 누수(漏水)가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선진국은 후진국보다 문제가 적은 나라가 아니다. 선진국 문제는 후진국 문제보다 몇 배 풀기 어렵다. 1968년 416km의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해 완공하는 데까지 2년 5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지속 불가능하고 비효율적 사회보장제도 개혁, 최적(最適) 인재를 길러내 최적의 자리에 배치하는 교육 제도와 성과(成果)·보수 시스템 혁신, 고용의 유연성 확보, 인구 감소나 노령화 대비 같은 사회 인프라 레일을 새로 깔고 정비하는 일은 고속도로 건설보다 훨씬 더디고 어렵다. 한국은 이미 지각생이다. 역사는 지각생을 벌(罰)하는 법이다.

한국 정치는 지난 20년 부스럼만 건드리고 속병(病)은 외면해왔다. 로마는 당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정치 시스템이 차례로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 시스템이 등장했기에 천 년 번영이 가능했다고 한다. 무너져야 할 것이 제때 무너지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거듭나지 못한다. 2024년은 구(舊)정치 몰락의 원년(元年)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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