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안개’ 뿜던 日 레전드 프로레슬러, 한국에 기술 전수하는 까닭?
국내 신규 프로레슬링 단체↑
일본 협회와 기술 협약까지
“어떤 동작이든 처음에 천천히 하다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내면 더 멋져 보입니다. 움직임은 예상할 수 없게 갑작스러워야 합니다. 기세를 드러내세요. 시선은 땅이 아니라 늘 정면을 향해야 해요. 누구나 앞구르기를 할 수는 있죠. 그러나 어떻게 구르고 일어설지, 그 디테일을 연구해야 프로입니다.”
한파와 폭설이 몰아치던 지난 16일 오전, 경기도 평택의 한 합기도장에서 15명의 남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서로 살을 부딪치고 있었다. 과장된 괴성이 난무했지만, 이들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다지리(53·본명 다지리 요시히로)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지리가 누구인가. 프로레슬링 종주국 미국 최고의 무대 WWE에서 성공을 거둔 유일한 동양인. 상대의 턱에 무자비한 회전톱날킥을 꽂고, 입에서 초록 물감을 내뿜는 ‘그린 미스트(Green Mist·毒霧)’로 안면을 피폭하던 희대의 반칙왕. 그리하여 한때 야구선수 이치로와 인지도로 자웅을 겨루던 일본 스포츠 스타. 30년째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 레전드가 일일 코치로 나타난 것이다. 30평 남짓한 한국의 작은 도장에.
◇“불모지… 다시 살릴 수 있다”
국내 신생 프로레슬링 단체 PWS(프로레슬링 소사이어티) 측이 연습생과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마련한 원데이 클래스였다. 상체·하체를 나눠 오전 10시부터 내리 두 시간 체력 훈련을 실시하더니, 점심 시간도 건너뛰고 곧장 기술 연습에 돌입했다. “짝!” 소리가 나게 서로의 목덜미를 잡는 기본 동작 ‘락업’ 등에서 다소 어정쩡한 자세가 나올 때마다 다지리는 진지한 조언을 건넸고, 다른 선수가 곧장 한국어로 통역했다. “소리를 더 내세요. 이건 가짜 싸움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비즈니스입니다. 그걸 꼭 기억하세요.” 연습생들은 곧장 “예, 파이팅”을 외치며 텐션을 끌어올렸다.
1960~70년대 전 국민의 볼거리였던 프로레슬링은 그러나 바닥을 찍었다. 1980년대부터 구기 종목에, 2000년대부터는 진짜로 치고받는 종합격투기에 밀렸다. ‘박치기왕’ 김일이나 ‘슈퍼드래곤’ 이왕표 이후 간판급 스타도 명맥이 끊겼다. 현재 국내 선수는 지리산 반달곰 개체 수보다 적은 50명 수준. 다지리는 “솔직히 한국 시장은 어떤 평가를 내릴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그렇기에 다시 만들어갈 찬스가 있는 것이죠. 이미 저는 미국과 일본에서 이룰 건 다 이뤘습니다. 큰 단체에는 더는 흥미가 없습니다. 가까운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의 본질을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마니아가 아니어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오락 말이죠.” 이날 다지리는 PWS 측과 공식 협약을 맺어, 정기적으로 기술을 전수하고 현 소속팀(규슈프로레슬링)과 선수를 교류하며 경기를 치르기로 했다.
◇프로레슬링, 한·일 교류의 새 장
지난 5월 다지리는 고(故) 김일 추모 경기 이후 16년 만에 처음 한국에 초청돼 링에 올랐다. 한·일 4개 단체가 협력해 서울 한성대 체육관에서 펼친 경기. 평소 다지리의 팬을 자처해온 유명 유튜버 케인TV 등이 참여해 일반 대중과의 접점을 늘렸다. 다지리는 “그날 팬들의 열기에서 재흥행의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상대가 올라탄 철제 사다리를 넘어뜨리고, 3단 로프에서 백덤블링해 몸통박치기를 날리고, 화해를 청하는가 싶더니 곧장 뒤통수를 쳐 기절시키는 등의 퍼포먼스가 나올 때마다 한 편의 마당극 같은 뜨거운 함성이 터졌다. 다지리는 온갖 빌런의 협공에 맞서 ‘그린 미스트’를 작렬시켰고, 결국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입소문이 났다. 9월 서울 중구구민회관에서 다지리와 함께한 두 번째 대회는 이례적으로 유료 관중 400명을 동원했다. 2018년 PWS를 창설하고 최근 다지리와 잇따라 경기를 치른 한국 프로레슬러 시호(32)는 “외부 전문가·모델·크리에이터 등과의 협업을 늘려 ‘한물간 옛날 스포츠’라는 인식을 없애고자 노력 중”이라며 “내년에는 협회 차원에서 ‘프로레슬링 스쿨’을 정식 론칭해 헬스장처럼 일상의 운동 공간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캐’로 유인하고 유튜브로 퍼뜨린다
16일 오후에는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서는 또 다른 신규 프로레슬링단체 ‘AKW’(전 한국 프로레슬링)가 80평 규모의 새 체육관 개장을 맞아 특별 대회를 개최했다. 오성홍기를 휘두르며 ‘중국몽’을 전파하는 공산당 레슬러 동쉔이 링에 올랐다. 자신의 당성(黨性)을 과시하고자 시합 전 전광판에 시진핑 주석의 사진을 띄우고, 피니시 기술로 ‘시진핑 슬램’을 고집하는 도발적인 캐릭터. 물론 설정일 뿐이다. 현재 현대코퍼레이션에서 상사맨으로 근무하는 한국인이니까. 중국 유학파 출신 김동현(31)씨는 “국민 정서를 자극해 관중을 끓어오르게 할 코믹한 악역을 고민했다”면서 “프로레슬링은 캐릭터라는 요소가 크다 보니 ‘부캐’(두 번째 자아)라는 요새 트렌드에도 부합하고 TV 중계가 없어도 유튜브 덕에 확장이 쉬워진 면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프로레슬링은 레슬링과는 별 관계가 없다. 기믹(gimmick)으로 불리는 선수 각자의 콘셉트에 따라 연기하는 ‘각본 있는’ 드라마다. 선과 악으로 나뉜 집단끼리 벌이는 ‘짜고 치는’ 싸움인 것이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 장외에서 벌어지는 말싸움, 화끈한 권선징악의 결말은 지금도 미국에서 WWE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이유다. 지난해 본격 행보를 시작한 AKW 공동 대표 헤이든(본명 이해동·36)은 “그간 한국 프로레슬링은 액션에 비해 스토리 전달 능력이 부족했다”면서 “사람들이 경기장에 오게 할 이유를 만들어 주기 위해 유튜브 콘텐츠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플렉스 연습하는 무서운 언니들
다시 평택으로.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에는 여자 프로레슬링 선수가 없다. 그러나 판도는 바뀔 것으로 보인다. 다지리의 일일 훈련에 참석한 15명의 연습생 중 5명이 여성이었다. 남자 친구를 따라 도장을 찾은 이예진(34)씨는 “운동도 할 겸 분위기를 체험해보고 싶어서” 이날 생애 첫 프로레슬링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다. 낙법과 파이팅 포즈 등을 연습하던 이씨는 곧 본인 몸무게 3배에 육박하는 거구의 미국인 선수 오메르타와 합을 맞춰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어요.”
지난 10월 WWE 우먼스 챔피언 출신 한국계 캐나다인 프로레슬러 게일킴(46)을 초청하는 등 흥행 요소를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서울의 한 유치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는 멜로디(35)씨는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캐릭터 분장)를 즐기다 보니 서로 접점도 있고 기술도 흥미로워 지난해 겨울부터 데뷔를 목표로 연습하고 있다”면서 “상대를 잡아 올려 뒤로 메치는 ‘수플렉스’ 같은 고난도 기술을 좋아하는데 유치원 아이들에게 가끔 ‘롤링’ 등의 기본 동작을 가르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필시 그들은 떡잎부터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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