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이순신’ 양규 장군님… 몰라봬서 송구합니다

정상혁 기자 2023. 12. 2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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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잊힌 구국의 영웅 극적 재조명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물”

“배역을 제안받고는 부끄러웠습니다. 서희·강감찬은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양규 장군은 몰랐거든요.”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역사적 조명이 드물었던, 출생연도조차 알려지지 않은 고려의 영웅 양규(楊規). 최근 흥행에 성공한 KBS 사극 ‘고려 거란 전쟁’에서 양규 역할을 맡은 배우 지승현(42)조차 지난달 제작 발표회에서 자신의 무지를 자책했을 정도다. 그러나 드라마가 시청률 10%를 넘기고 정통 사극으로는 처음 넷플릭스 국내 시리즈 1위에 오르는 등 선전하면서 극적인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양규를 ‘고려의 이순신’으로 추앙하는 X(옛 트위터) 계정이 속속 생겨나고, 팬아트 인증이 잇따르고, 전투 활약상을 분석하는 유튜브 콘텐츠가 쏟아지는 등 관심이 치솟는 중이다. 지씨는 말했다. “고려가 없어질 수도 있었던 가장 암울한 시기에 나라를 구한 용장 중 한 분이십니다.”

◇역사에 묻혀있던 기적의 전투

사극 '고려 거란 전쟁'에서 양규 역을 맡은 배우 지승현. /KBS

양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역사 소설도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그가 승리로 이끈 전투 자체가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드라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1010년 음력 11월, 황제가 이끄는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략해 왔다. 정변으로 왕위에 갓 오른 초보 임금 아래 중앙집권의 기틀조차 미약했던 고려. 중원에서 송나라를 몰아내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거란. 확연한 우열 속에서, 양규는 최전방 요새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맞이했다. 화포가 없던 시절이긴 하나, 겨우 3000명 남짓한 군사로 일주일간 이어진 거란 40만 대군의 파상 공세를 버텼다. 예상과 달리 첫 관문부터 꼬여버린 거란 황제는 만약을 대비해 병력의 절반만 데리고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거란군은 고려의 본진 통주에서 30만 대군을 대파하며 진격해 음력으로 이듬해 1월 1일 수도 개경에 입성한다. 현종 임금은 서둘러 몽진을 떠나야 했다. 파죽지세의 거란군은 그러나 열흘 뒤 철군을 결정한다. 양규의 맹활약이 결정타였다. 군사 1700명을 이끌고 거란군 6000명이 주둔한 곽주성을 습격해 탈환하며 보급 및 퇴로를 끊었기 때문이다. 성을 함락하려면 통상 10배 정도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믿기 힘든 성과였다. 이후에도 퇴각하는 거란군을 쫓아 소수의 병력으로 끈질긴 게릴라전을 벌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 3만여 구(口)을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려사).”

◇“책임감 강한 공직자가 필요하다”

'고려사'에 기록된 양규의 최후. 거란군의 퇴각도 함께 기술돼있다. /규장각

KBS 사극의 동명 원작 소설 ‘고려 거란 전쟁’의 저자 길승수 작가는 “양규에 대해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흥화진에 머무는 대신 성 밖으로 나와 거란군을 계속 공격하잖아요. 무모할 정도로요. ‘왜 자기 살 궁리를 안 하지?’ 싶었어요. 그분은 자기 책임을 다한 겁니다. 양규의 직책은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였습니다. 서북면과 서북면의 백성을 지키는 일, 내가 맡은 임무는 목숨 걸고 완수한다는 자세.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고, 그래서 대중이 반응하는 게 아닐까요.”

“얼마 뒤 거란의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오자 양규와 김숙흥이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했다. 거란군은 여러 장수들의 초격(鈔擊)을 받았고, 또 큰 비로 인해 말과 낙타가 쇠잔해졌으며,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려 압록강을 건너 퇴각했다.” 1011년 음력 1월 28일, 고려사에 기록된 양규의 최후다. 그러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거란군의 피해는 컸고 재침공까지 3년이 걸렸다. 그사이 고려는 일전을 대비할 수 있었다. 이후 벌어진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등의 승리는 이 같은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영웅의 예우, 지금의 우리는…

사극 '고려 거란 전쟁' 촬영장에서 양규(지승현·왼쪽)와 현종(김동준)이 웃어보이고 있다. 실제 역사 속에서 현종은 전사한 양규를 공신으로 대우하고 유족에게도 후한 포상을 내렸다. /KBS

1019년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의 전공을 치하하고자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했고, 1024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봉해 기리는 등 융숭히 예우했다. 아들 양대춘은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했고, 손수 교서를 지어 양규의 처 은률군군 홍씨에게 하사했다. “그대의 남편은… 송죽 같은 절개를 지키며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밤낮으로 헌신했다. 지난번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며 지휘하니 그 위세로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해 사로잡아 나라의 강역을 안정시켰다… 뛰어난 공을 항상 기억하여 이미 훈작과 관직을 올렸으나 다시 보답할 생각이 간절하므로 더 넉넉히 베풀고자 한다. 해마다 그대에게 벼 100석을 하사하되, 평생토록 할 것이다.”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며 존재가 희미해졌을 뿐 고려시대 내내 양규는 구국의 영웅으로 숭상됐다. 양규의 후손들도 왕실의 포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전쟁과 역사’ 저자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은 “고려의 양규와 조선의 충무공만 봐도 나라를 지켰으면 정치적 배경을 막론하고 공에 걸맞게 예우했고 그걸 못 하는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면서 “지금 우리는 이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행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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