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귀여운 월동 준비를 하지 못했다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라이 위스키
엄청나게 귀여운 월동 준비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아기곰이나 지렁이 모양의 젤리를 꼬냑에 담가둔다는, 그랬다가 겨울 내내 하나씩 꺼내 먹으면 그렇게나 좋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밤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갓 나온 소설을 읽다가 이 귀여운 월동 준비가 떠올랐다. 대추야자 설탕에 절인 과일과 무화과가 나오고 사탕과 초와 약속과 흥분으로 가득한 도시의 풍경이 묘사되는 것도 그랬지만 결정적으로 아래의 문장 때문에.
“말리 고모는 크리스마스 쿠키를 구웠다. 고모는 별 모양의 계피 쿠키와 초콜릿 링, 커다란 사기그릇에 오래 보관하면 보관할수록 더 맛이 좋아지는, 한입에 녹아버리는 아나 마리아 아말리아의 후자렌도넛을 구웠다. 파삭파삭한 갈색의 파시앙스라는 이름의 알파벳 쿠키도 구웠는데, 알파벳 전체를 다 구웠다. 그리고 하얀 생크림이 올라가는 스페인 바람이라는 이름의 푸딩도 구웠고, 마르치판, 마르멜로 젤리, 럼 트뤼프도 만들었다.”(「크리스마스 잉어」, 비키 바움 저, 박광자 역, 휴머니스트)
이런 문장은 도무지 축약할 수가 없다. 인용문처럼 그럴싸한 크리스마스 무드에 실제로 젖어본 적은 없으나 내가 누군가. 달콤하고 향기로운 것들을 한없이 병렬하는 수법(?)으로 어린이 독자들의 마음을 훔친 책을 읽으며 한 자 한 자 마음에 새겼던 과거의 어린이 아닌가.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한 이국의 명사들에는 마력이 있어서 스스로를 어린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나처럼 냉랭한 사람에게도 그런 보드라운 어린이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마법을 부리는 것이다.
저 책을 읽다가 나는 ‘아아!’하고 탄식했다. 물론 속으로. 아기곰과 지렁이로 하는 귀여운 월동 준비가 떠오른 동시에 그 귀여운 월동 준비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잊고 만 나의 무심함 때문에 그랬다. 나는 좀 너무하는 데가 있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 말하기도 그렇고. 최근에는 집안의 전구가 거의 나갔는데 손을 놓고 있다가 결국 하나 남았을 때 전구를 간다든가 하는 일도 그렇다 치자. 그런데 기억했다가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일들마저 이런다니. 하지 않아서 대단한 손해를 입은 건 아니지만 즐거움 하나를 잃었다는 느낌은 확실히 든다. 이제라도 하면 될 텐데 하고 싶지 않다. 이런 건 12월을 기다리며 가을에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어서.
귀여운 월동 준비에 대해 들은 것은 위스키를 먹다가였다. 무려 5종의 라이 위스키. 이 위스키들을 내게 맛보이고 싶어서 가방에 5병의 위스키를 짊어지고 온 분이 계셨다. 여기에 글렌캐런 잔과 스트레이트 잔까지, 위스키를 마실 전용잔까지 가방에서 꺼내는 그 분을 보며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분은 누구인가. P로 시작되는 닉네임으로만 알던, 술과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와 블루베리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던 나의 ‘인친’이시다. 만남을 갖기로 했을 때 P님은 이름과 신상(?)에 대해 알려주셨으니 그분은 내게 여전히 P님이다.
위스키 때문이었다. 위스키 중에서도 라이 위스키를 좋아하는 P님이 소개해서 알게 된 라이 위스키가 있다. 그때까지 마셔본 적이 없으므로 이름만 아는 위스키였다. P님은 미국에서 사 왔다고 알고 있지만 혹시나 저 위스키를 구할 수 있는 판로를 물었더니 가격이 너무 뛴데다 구하기도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맛을 보여주고 싶으시다며 약속을 잡으셨다. P님이 그녀가 약속 장소로 정한 룸이 있는 장어집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늦은 여름이었다. 늦은 여름이었으나 더위가 가시지 않아 한여름이라는 기분이 드는 여름.
한겨울 밤의 꿈.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마신 위스키 이름은 이랬다. A Midwinter Night’s Dram이라는 라이 위스키. dream이 아니라 dram이라 ‘한겨울 밤의 꿈’이 아니라 ‘한겨울 밤의 끔’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영어로 위스키 한 모금이 ‘dram’이라 이렇게 썼단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을 ‘한겨울 밤의 술 한 모금’으로 바꾼 술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이 술이 궁금했는데, ‘드림’이 아니라 ‘드램’이라고 하니 좀 더 달콤한 꿈을 꾸며 코를 고는 소리로 들렸달까. 인간 말고 요정이 말이다.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퍽(Puck) 같은 장난꾸러기 요정의 코골이 소리로.
라이 위스키 5병 중에 3병이 모두 A Midwinter Night’s Dram이었다. 각각 포트 배럴, 프렌치 오크 포트 배럴, 화이트 배럴에서 숙성한 ‘겨울밤’이었다. 모두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화이트 배럴이었다. 혹시라도 잊을까봐 여기에 적어둔다. 이제 시간이 한참 흘러서 세 병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적을 수 없다. 모두 뭐라 말할 수 없이 달콤한 냄새가 났다는 것만 기억난다. 체리, 건포도, 말린 오렌지 껍질에 모과 잼(이게 ‘크리스마스 잉어’에도 나오는 마르멜로다), 여기에 넛맥, 카다멈, 클로브, 바닐라 빈, 통카 빈 같은 온갖 향신료 냄새까지. 원래도 호밀로 만들어 스파이시한 라이인데, 여기에 향신료 냄새까지 넘실대는 ‘겨울밤’을 우리는 산초가루와 시소잎을 범벅한 장어와 함께 마셨다. 우리에게는 장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향신료를 좋아한다는 공감대도 있었다. 이렇게 향신료와 함께 먹으면 장어가 덜 느끼하다고 말하며 마지막 한 점까지 먹었다. 광주의 갓김치와 함께 먹는 장어와 부산의 방아잎과 함께 먹는 장어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말이다.
슈톨렌이나 파네토네에서 날 법한, 술에 오래 절인 말린 과일과 향신료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P님이 말했던 것이다. 아기곰과 지렁이 젤리를 꼬냑에 절여두고서 겨울에 먹으면 좋다고. ‘엄청나게 귀여운 월동 준비군’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슈톨렌이나 파네토네에 넣는 말린 과일은 럼에 절인다고 알고 있는데 세상에 꼬냑이라니. 이건 정말 대단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잊고 말았고, 이렇게 뒤늦게 속상해하고 있다.
midsummer에는 하지라는 뜻이 있다. 일 년 중에 가장 낮이 긴 날. 그렇다면 midwinter는 동지. 일 년 중에 가장 밤이 긴 날. 어제가 바로 동지였다. 춥고, 캄캄하고, 무거웠다. 이제 점점 밤은 짧아지고 낮이 서서히 길어지고, 그렇게 다시 여름이 오고, 또 하지가 오고, 한여름의 나는 한겨울 밤의 꿈을 떠올리겠지. 엄청나게 귀여운 월동 준비를 올겨울에는 하겠다고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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