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멧에 거북선 새겨… 연전연승 역사 쓰고 싶다
“스켈레톤? 그게 뭔데?”
동계 썰매 종목 스켈레톤 국가대표 정승기(24·강원도청)는 중학교 3학년이던 2014년 윤성빈(29·은퇴)이 얼음 위를 빠르게 질주하는 걸 보고 스켈레톤에 매료됐다. 부모님께 썰매를 타겠다고 졸랐다. “대체 무슨 종목이냐”고 말할 정도로 스켈레톤을 잘 모르는 부모님을 설득하려 경기 사진들을 찾아 보여줬다.
정승기는 학교 대표로 육상 대회에 나갈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았다. 하지만 시청 공무원인 부모님은 아들이 공부하길 바랐고, 정승기가 전부터 “축구를 하고 싶다” “육상을 하겠다”고 말할 때마다 말렸다. 하지만 썰매를 타겠다고 할 때 정승기 눈빛은 전과 달랐다. “스켈레톤 아니면 안 돼”라고 강하게 말했고, 부모님은 아들 고집을 꺾지 못했다. 정승기는 파주 두일중에서 평창 대관령중으로 전학, 스켈레톤 외길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세계 최고에 올랐다. 정승기는 지난 8일(현지 시각) 프랑스 라플라뉴에서 열린 2023-2024 IBSF(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 스켈레톤 월드컵 2차 대회에서 1·2차 합계 2분00초61을 기록, 영국 맷 웨스턴(26·2분00초69)을 0.08초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정승기의 첫 월드컵 금메달. 그리고 15일 월드컵 3차 대회(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1분44초99로 은메달을 차지, 두 대회 연속 입상했다. 정승기는 랭킹 포인트 627점을 쌓아 세계 1위로 올라섰다. 3월 말까지 열리는 시즌 대회에서 꾸준히 입상해 최종 1위로 시즌을 마감하는 게 목표다.
한국 선수가 월드컵 금메달을 딴 건 2020년 1월 윤성빈 이후 정승기가 처음이다. 윤성빈이 2018 평창 올림픽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썰매 종목 금메달을 차지해 한국 스켈레톤 희망을 열어젖혔다면, 이제 정승기가 그 뒤를 차근차근 밟고 있다. 정승기에게 윤성빈은 스켈레톤 꿈을 갖게 해준 고마운 선배다. 평소 안부를 주고받으며 좋은 형, 동생 사이로 지낸다. 정승기는 ‘최초’ 역사를 쓴 윤성빈처럼 자신도 이름을 남기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해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첫 한국 스켈레톤 선수가 되는 거잖아요. 이번 시즌 자신감도 한껏 쌓였고, 2년 준비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봐요. ‘최초’ 주인공이 되는 건 너무 멋진 일이에요.”
최고 시속 140~150㎞에 이르는 스켈레톤은 썰매에서 가장 짜릿한 종목으로 꼽힌다. 루지는 다리를 앞에 두지만 스켈레톤은 머리가 앞으로 향하게 엎드린다. 중력의 5배에 이르는 압력이 가해져 머리를 들지 못하는 구간도 많다. 정승기는 “심한 코스는 절반가량 하얀 바닥만 보고 질주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건 극심한 공포지만, 동시에 엄청난 쾌감”이라고 했다. 경주 도중 미세한 움직임으로도 순위가 갈리는 만큼, 전방 주시가 안 될 경우를 감안해 코스를 익히고 또 익혀야 한다. 1분 남짓 한 번의 슬라이딩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반복한다.
정승기는 2021-2022시즌 월드컵 첫 메달(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그 다음 시즌 은메달을 3개 차지했다. 하지만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다. 정승기가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서기 위해 반복한 연습은 스타트. 기록 단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순조로운 출발이기 때문이다. 평창에는 한여름에도 스타트 훈련을 할 수 있는 컨테이너형 건물이 있다. 일종의 대형 냉동고다. 정승기는 여름에도 쉬지 않고 헬스와 스타트 연습을 반복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올 시즌 3번 치른 월드컵에서 총 6번 슬라이딩했는데, 스타트 기록은 전부 1등이었다. 코스마다 다르지만 4.6~5.5초 기록들을 냈다. 스켈레톤엔 “스타트 0.1초 차이는 최종 0.3~0.4초 차이로 벌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중요한 스타트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지는 현역 선수가 바로 정승기다.
썰매 경력 10년에 접어들다 보니 정신력도 한층 더 강해졌다. 어린 시절엔 다른 선수들 기록이 신경 쓰이고, 이를 의식해 저조한 성적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 대회들을 치르며 ‘내가 잘하면 좋은 기록이 나오고, 실수하면 순위가 밀리는 정직한 종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다른 선수 플레이 장면, 기록은 보지 않는다. 나한테만 집중하면 된다. 경기장 얼음 위는 정직하다”고 했다.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제프 페인(53·캐나다) 한국 코치도 정승기에게 “남을 의식하는 종목이 아니다”라고 계속 강조하는 등 멘털 관리를 도왔다.
정승기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운동선수다. 코로나 기간 운동 여건이 여의치 않자 펜을 잡고 한국사를 공부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 관련 영화들도 인상 깊게 본 그는 이번 시즌 자신의 헬멧에 거북선 문양을 새겨 넣었다. 윤성빈이 수퍼 히어로 캐릭터인 아이언맨을 떠올리게 하는 헬멧으로 이목을 끈 것처럼, 정승기는 얼음 위 거북선으로 불린다. 정승기는 운동선수는 한 국가의 역사·문화를 알리는 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제가 좋은 성적을 계속 낸다면, 외국 사람들이 저에게 헬멧 문양 의미를 물어보겠죠. 우리의 멋진 거북선이 많이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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