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팁은 필요 없습니다”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최여정의 다정한 안부] 일본에서 팁 주면 불쾌해한다… 진심 어린 칭찬을 더 좋아해
팁으로 1000엔 정도면 되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빳빳한 1000엔 지폐 한 장을 지갑에서 꺼내들었다. 지폐를 놓는 위치도 고민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 먼저 시선이 가는 화장대 앞에 놨다가, 침대 옆 소파에 올려두었다가,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침대 테이블 위 알람시계 옆에 얌전히 올려 두었다. 최근 일본어 공부 재미에 푹 빠진 친구가 쓴 ‘아리가토 고자이마스(ありがとう ございます·감사합니다)’ 메모와 함께.
3박 4일 일정으로 도쿄 여행을 다녀왔다. 매일 3만5000보 이상을 걷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신주쿠에 있는 호텔을 나와 걷기 시작해서 롯폰기, 하라주쿠, 시부야 등 유명 번화가를 지나 도쿄 시민들이 살고 있는 소박한 풍경의 주택가 골목길로 발길을 옮긴다. 할머니와 등굣길에 나선 귀여운 아이들과 인사도 나누고, 어스름 녘 시장기를 느끼며 저녁 짓는 정겨운 냄새에 이끌려 걷다 보니 호텔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었다. 여행 둘쨋날, 근육이 생기려는지 찌릿찌릿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호텔 앞 로손 편의점에 들러 일본 맥주 몇 캔을 사들고 호텔 방문을 열었다.
문 옆 욕실을 지나치며 흘끗 보니 깨끗하고 보송하게 말려진 하얀 타월들이 한 치 흐트러짐 없이 나란히 놓여 있고, 고급 화장품 브랜드의 어메니티(로션, 샴푸 등 서비스 용품)들은 이제 막 출정식을 마치고 전쟁터로 향하는 병정들의 발걸음처럼 각을 맞춰 대열하고 있다. 호텔 룸의 정돈 역시 완벽하다. 침대 발치 모서리에 단단히 끼워 고정해둔 사각거리는 침대보와 각도를 맞춰 세워둔 베개 세트들. 베드사이드 테이블로 시선을 돌리는데, 1000엔 지폐가 그대로 있다. 엇, 우리 실수했나?
도쿄는 10여 년 만의 방문이었다. 1960년대부터 이미 인구 1000만을 넘기 시작한 메트로폴리탄 도쿄이지만, 골목의 작은 식당에서 주문할 때나 거리에서 길을 물을 때 영어 사용이 불편했고 온통 히라가나, 가타카나로 되어 있는 간판과 안내문 등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도쿄도 이런데 지방은 오죽했을까. 홋카이도 어느 시골 온천마을에서는 일본어를 몰라 버스를 탈 때마다 쩔쩔매곤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방문한 도쿄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지하철 노선도는 영어는 물론 숫제 한글까지 병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번화가 식당과 커피숍들은 일제히 한국어 메뉴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세상 많이 변했다 생각했다. 그러니 팁 문화도 바뀌지 않았을까 했던 것이다.
일본엔 팁 문화가 없다. 오히려 서비스를 하고 돈을 받는다는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는 팁을 위한 동전 가방을 따로 챙겨 다니는 것이 일이었는데, 이 칼같이 깔끔한 사람들 보게나. 일본에 팁 문화가 없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깔려 있다. 하나는 ‘쇼쿠닌 기시쓰’ 그리고, ‘기리’.
‘장인’으로 번역되는 ‘쇼쿠닌 기시쓰’는 일본인들의 생활 저변에 흐르는 마음가짐이다. 대대손손 메밀면을 뽑거나, 우동 국물을 우려내거나 기가 막힌 모치 앙금을 만들거나 하여 몇백년 가업을 이어가는 일본인들에게 ‘장인’은 공예나 예술로 한정되는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먹을거리, 생활용품 등에 임하는 모든 사람이 해당된다. 관광객을 대하는 서비스에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초밥 장인, 호텔리어 장인, 푸드카트 판매 장인 등 우리가 일본을 여행하며 만나는 많은 서비스 직종의 사람들 사이에서 완성된 철학이다. 일본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는 그들의 자존심이 담겨 있어서 ‘돈’이 아니라, 일본어로 건네는 ‘진심어린 칭찬’을 더욱 기쁘게 받아들인다니, 이 사람들 놀랍다. 21세기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유혹을 물리치는 장인정신이라니.
또 하나는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말한 ‘기리’다. 우리말로 하면 ‘의리’ 정도를 뜻하는 ‘기리’는 자신이 받은 은혜는 반드시 그만큼 되돌려 갚아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타인의 친절과 호의와 보살핌을 받나. 인생은 사실 나의 ‘계획’이 아니라, 타인의 ‘관심’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종종 잊는다. 나도 누군가의 베풂을 받고 나면 안절부절못하다가 반드시 그만큼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데, 일본인들은 여기에 더해 그 갚는 시간도 제한되어 있으니 이 생을 다하기 전에 반드시 받은 만큼 되돌려 갚아 보상해야 한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이렇게 감사의 마음으로 전하는 손님들의 지폐 한 장도 마음속에 쌓이고 쌓이는 무거운 짐과도 같아서 이걸 다 언제 갚나, 밀어 올려도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시포스의 바위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신자본주의에 찌들어 살고 있는 나와 친구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브랜드 비누 가격을 검색해보고 깜짝 놀라서는 매일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새롭게 채워지는 어메니티들과 커피머신 캡슐들을 모두 챙겨왔다. 당분간 샴푸, 린스, 비누 살 일 없고, 커피 캡슐도 한 달 치는 될 것 같으니 곳간이 그득한 기분이다. 정말 감사해서 팁을 드린 건데, 안 받으시다니. 1000엔 지폐를 다시 지갑에 넣으며 속삭였다.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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