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지하실’서 못 빠져 나오는… 여성보다 소외된 약자 남성들
연애·결혼 포기한 초식남·인셀 등 전통적 남성상서 소외된 남성 분석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스기타 슌스케 지음 | 명다인 옮김 | 또다른우주 | 236쪽 | 1만6800원
초식남(초식동물처럼 온순한 남성), 이대남(20대 남성), 인셀(비자발적 독신남·involuntary celibate). 남성을 지칭하는 이런 신조어엔 공통점이 있다. 고립감 같은 부정적 감정이 깔려 있되, 다수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 일본에선 1990년대 불황 이후 ‘초식남’이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현상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고, 한국에선 최근 몇 년 사이 남성에 대한 역차별에 맞서는 집단으로서 ‘이대남’이 부각됐다. 인셀 집단의 분노가 현실에서 여성 대상 범죄로 이어지는 사례도 영국·미국 등 해외에서 잇따른다. 남성의 고립에서 야기된 사회적 문제가 가시화된 시점에서, 일본의 사회·문화 비평가인 저자는 묻는다. 왜 남성은 불안한가. 여성에 비해 더 많은 특권을 지니고 있음에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유리 천장 있듯, 유리 지하실도 있어”
책은 ‘약자 남성’이란 개념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큰 틀에서 “정규성에서 탈락한 남성”을 뜻한다. 나열하자면 꽤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능한 취급을 당하는 남성, 결혼 등 전통적 가족상에서 벗어난 남성, 외모·장애 등 이유로 상대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남성. 자본주의가 심화되며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고, 가족의 모습이 다양해지는 요즘, 이런 남성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날 수밖에. 이들의 특징은 남성 위주 사회에서 혜택을 본 것도 아니면서, 여성·장애인을 비롯해 최근 부각되는 소수자 담론에서도 배제된다는 점이다. ‘약자 남성’은 여성과 대비되는 개념은 아니다. 다른 성별과 비교하는 ‘안티’ 담론을 넘어, ‘약자 남성’이란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이 괴로운 이유를 알아보자고 말한다.
저자는 영화 ‘조커’(2019)의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을 “현대를 사는 약자 남성의 상징”으로 꼽는다. 플렉은 가난한 형편에 광대 일을 하며 치매 어머니를 홀로 보살핀다. 어린 시절 학대 당한 아픔 때문에 웃음을 멈출 수 없는 질환을 앓지만, 정부 보조금 삭감으로 심리 치료가 중단된다. 그는 전통적 의미의 주류 집단인 ‘백인 남성’에 속했음에도, 설 자리가 사라지며 악당 ‘조커’가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저자는 ‘유리 지하실’이란 표현을 쓴다. 여성이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지위에 오를 수 없는 현상을 ‘유리 천장’이라고 부르듯, 남성에게도 지하실로 굴러떨어졌지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뜻이다.
◇”남자들의 약함은 ‘약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일본에서는 통계적으로 ‘약자 남성’이 확인된다. ‘2021년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156국 중 젠더 격차 120위. 여전히 국회의원의 약 90%가 남성이며,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의 두 배 이상이다. 그러나 대다수 설문에서 남성의 행복감은 여성에 비해 낮게 나온다. 저자는 그 이유로 “퇴직하거나 정규직 고용에서 밀려나면 남성들은 불행해질 리스크가 커진다”는 점을 든다. 많은 남성이 가정보다는 일터에서 행복감을 추구하기 때문에, 고용이 불안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행하기 쉽다는 뜻. 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약자 남성’ 문제의 해결책으로 마음, 의지 같은 개인의 내면에 집중한다. 그는 “약자 남성으로서 폭력을 둘러싼 어려운 문제들과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들이 각자의 약함을 인정하고, 언젠가 인정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라는 것. 대신에 정상적 남성상으로 인정되지 않는 삶일지라도, 즐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러 모델을 제시한다. 그는 “‘오타쿠 남성’ ‘초식남’ ‘육아남’ 등의 모델이 나온 것처럼, 남성의 생활 방식 규범에도 다양한 변주 또는 선택지, 이야기, 문화가 생기길 바란다”고 한다. 여성 담론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보편적 남성 담론을 제시하는 시각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해결책으로 개인적 실천을 제시하며 끝나는 구성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약자 남성’의 존재를 인정하자는 책의 메시지는 남녀가 서로의 ‘안티’로 치달은 오늘날 한국에도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남녀 문제가 상대성의 문제를 넘어,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엄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만 지금의 교착 상태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 다만 한국은 일본과 달리 ‘남성학’이란 개념이 생소하고, 병역 문제 등 특수성이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순 없다.
책의 해제를 쓴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부교수는 “스키타의 작업은 가해자에게 서사를 주는 방식이 아니라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당사자의 몸짓”이라면서도 “능력주의와 병역이 여전히 남성성의 핵심 요소인 탈식민 분단 국가 한국에서 스키타의 ‘약자 남성’론이 어떤 울림이 있을지, 남성 신화에 과연 어떤 균열을 일으킬지는 아직은 가늠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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