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장어, 쥐치회, 물메기탕 안주에 푸른 병이 쌓여 갔다
[양세욱의 호모 코쿠엔스] 부산 ‘거제집산꼼장어’
국립해양박물관장의 퇴임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연이 오랜 선배다. 서둘러 약속 날짜를 빼앗아 부산 영도로 향했다. 임기 3년의 마지막 손님이 될 거라고 했다. 전국에 하나뿐인 섬 단위 자치구이자 ‘커피의 섬’인 영도에는 바다 관련 공공기관이 많다. 해양경찰서, 해양환경조사연구원, 해양수산연구원을 차례로 지나면 바다를 등지고 국립해양박물관이 나타난다. 한국해양대도 지척이다.
오륙도와 신선대가 손에 잡힐 듯 내다보이는 호쾌한 바다 경관은 변함이 없지만, 개관 11년 만에 전면 개보수를 막 마치고 난 박물관은 달라져 있었다. 눈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은 활기가 넘치고 도슨트의 안내로 둘러본 전시관은 번번이 발길을 멈춰 세웠다. 관람을 마치고 영도대교를 되돌아 자갈치시장으로 향했다. ‘거제집산꼼장어’의 긴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시아 최대 어시장인 자갈치 시장이 있고, 국제 시장, 부평 깡통 시장, 보수동 책방 골목이 이웃인 남포동만큼 부산다운 부산도 드물다. 고층 건물 뒷골목에 들어서면 부산이 아니고는 마주치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진다.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외침이 들려올 듯한 자갈치 시장 입구에는 ‘꼼장어’ 간판을 내건 식당들이 모여 있다. 테이블 네댓 개가 전부인 ‘거제집산꼼장어’는 외관도 내부도 메뉴도 특별할 게 없지만 전채로 나온 나물과 고구마, 김치 굴무침, 감자전만으로도 30년 업력이라는 주인 ‘아지매’의 음식 솜씨를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하다.
‘자장면’에서 짜장면의 풍미가 느껴지지 않듯이, ‘먹장어’라는 밋밋한 표준어에서는 소주를 부르는 꼼장어의 매력이 반감된다. 달군 불판 위 꼼장어들은 이름대로 격렬하게 꼼지락거렸다. 신선한 꼼장어는 껍질이 벗겨진 상태로도 하루를 버틴다. 불판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꼼장어들은 주인의 능숙한 손놀림에 막혀 되돌아왔다. 요동이 잦아들고 양파와 대파, 마늘을 넣고 다시 한참을 볶아낸 뒤라야 꼼장어를 맛볼 수 있다.
기름을 두르지 않고 볶아낸 ‘기장집’ 꼼장어는 고소하다. 기장군 인근에서 흔한 짚불구이보다는 담백하게 구워낸 꼼장어가 취향에 맞는다. 기름장과 들깻잎을 곁들여 절반쯤 먹고 난 뒤 다시 양념을 넣고 볶아 나머지를 먹는다. 꼼장어(소 5만원, 중 6만원, 대 7만원)와 서비스 고등어구이만으로 이미 소주 여러병이 쌓여가고 있었다.
쥐치회와 물메기탕이 이어졌다. 쫄깃한 식감의 쥐치는 광어나 우럭만큼이나 흔한 횟감이지만, 손바닥 크기인 보통 쥐치에게서 나오는 회의 양은 적어서 한 접시를 채우려면 대여섯 마리 이상이 필요하다. 주인이 어항에서 꺼내 온 쥐치는 여태 보지 못한 크기였다. 생선은 크기에 비례해서 두께도 도톰해진다. 광어 크기 쥐치 두 마리에게서 나온 회의 양과 식감은 놀랍고, 보통 쥐치에게서는 맛보기 어려운 애는 고소했다.
겨울 남해안은 물메기탕이 지천이다. 한 끼 식사로도 훌륭하지만 해장 음식으로 물메기탕에 대적할 메뉴는 드물다. 해장용 물메기탕을 안주 삼아 술을 비우는 이 모순과 긴장감을 모른다면 진정한 애주가로 자처하기 어렵다. 숱한 물메기탕을 경험했지만, 단순한 양념과 조리법으로 신선한 식재료의 풍미를 극한으로 끌어내는 ‘거제집’의 물메기탕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어느덧 일행의 대화는 남해안의 물메기와 동해안의 곰치가 동종인지 논쟁으로 번졌다. 어종을 둘러싼 논쟁은 대개 허망하다. 표준의 말과 분류가 엄연히 있지만, 지역에 따라 분류 기준에 따라 천태만상인 해산물 명칭은 그야말로 ‘대혼돈의 멀티버스’다. 결론을 말하면, 물메기와 곰치는 다른 어종이지만 물메기는 물메기가 아니고, 곰치는 곰치가 아니다. 흔히 물메기로 부르는 어종은 거의 꼼치고, 곰치로 부르는 어종은 대부분 미거지라는 것이다.
오랜만에 통음(痛飮)을 했다. 즐거운 대화만 한 안주가 있겠는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무렵 테이블 주변에는 푸른 병이 무수히 나뒹굴었다. 축하를 위해 방문했다가 결국 신세만 지고 말았다. 어쩌랴. 다음 자리를 기약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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