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정부 실망 크지만 그래도 보수" 30대 "야당 지지 늘어"
출렁이는 부산 민심 르포
지난 21일 부산시 중구 부평동 깡통시장 내 15평 남짓한 가맥집. 김윤호(52)씨와 정일중(52)씨가 이른 저녁부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연스레 정치 얘기를 술안주로 삼던 이들의 대화는 이내 큰소리로 이어졌다. “평생 보수 정당을 지지했지만 이젠 여당 야당 모두 싫다”는 김씨와 “그래도 보수 정당을 찍어야지”라는 정씨의 주장이 맞부딪히면서다.
김씨는 “윤석열 정부한테 기대한 게 많은데 실망이 크다”며 “사는 게 팍팍한데 경제 살릴 생각은 안 하고 끼리끼리 인맥 정치만 한다”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정씨는 “마! 그건 민주당이 허구한 날 발목만 잡아서 그런 거 아이가. 대통령이 된 사람이 일 좀 하겠다면 밀어줄 줄도 알아야지 시비만 거는 게 남자가”라며 발끈했다. 30년 동갑내기 친구인 이들은 정치 문제로 이렇게 의견이 갈린 적이 없었다며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보다 못한 가게 주인이 “둘 다 적당히 좀 싸우라 안 카나. 지들도 싸우면서 누가 누구 욕을 하노”라며 핀잔을 줬지만 이들의 정치 논쟁은 이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부산 민심이 출렁이고 있다. 무엇보다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에 따른 후유증이 만만찮다는 게 현지에서 만난 주민들의 공통된 전언이었다. 여기에 윤석열 정부의 낮은 지지율과 국민의힘 내부 상황, 팍팍한 민생 경제 등이 겹치면서 견고했던 보수 정당 우위 구도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다. 한국갤럽이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인 지난 5~7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부산·울산·경남(PK)의 윤 대통령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35%, 국민의힘 지지율은 37%로 전주보다 각각 5%포인트씩 낮아졌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지난 20~21일 현지에서 접한 부산의 민심도 영하 7도까지 떨어진 날씨 못지않게 쌀쌀했다. 깡통시장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이모(56)씨는 “부산 엑스포가 표를 그렇게 적게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기대만 겁나 하게 해놓고 결과가 이게 뭐꼬”라며 고개를 저었다. 자갈치시장에서 8년째 반찬가게를 하는 이모씨도 “지난 7월 윤 대통령이 시장을 찾았을 때 우리 모두 대통령 이름을 연호하며 한마음으로 응원했었다”며 “엑스포가 돼서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면 도시락 가게라도 내려고 했는데…”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여전히 기대감을 잃지 않고 있다는 반응도 적잖았다. 이달 초 윤석열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이 들러 유명해진 깡통시장 내 어묵집 관계자는 “그래도 이렇게 노력해준 게 어디냐”고 했고, 근처 신발가게 상인 김모씨도 “민생을 1순위로 챙긴다 했으니 꼭 약속을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산은 역대 총선에서 ‘보수의 텃밭’이란 대구·경북(TK) 지역 못지않게 보수 정당의 전통적인 강세 구도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더불어민주당도 최근 세 차례 총선에서 부산 18개 지역구 중 19대 2곳, 20대 5곳, 21대 3곳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50대 김씨 부부도, 인근의 국밥집 사장도 민주당에 대해서는 “현 정부가 썩 맘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민주당은 좀…”이라며 말끝을 흐리기 일쑤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3년 됐다는 깡통시장 상인 이모(55)씨는 “부산은 서울과 확실히 분위기가 다른 것 같다”며 “서울이 반반 정도라면 여기는 보수 8, 진보 2인 느낌”이라고 전했다.
그런 가운데 공고하던 국민의힘 지지 분위기에도 조금씩 균열의 조짐은 보이고 있었다. 특히 2030 청년 세대의 목소리는 “그래도 보수”라는 기성세대와는 사뭇 달랐다. 부산 서면의 ‘젊음의 거리’에서 만난 30대 회사원 김모씨는 “이준석 하나 끌어안지 못하고 장관 인사 때마다 논란을 빚으면서 어떻게 지지를 바랄 수 있느냐”며 “윗세대야 관성적으로 보수 정당을 지지할지 몰라도 내 주변에선 최근 민주당 지지자가 꽤 생겼다”고 전했다. 또 다른 30대 박모씨도 “국민의힘은 무조건 대통령 산하기관처럼 행동하는 것 같다”며 “이번에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임명한 것도 결국 윤 대통령 뜻대로 하겠다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젊은 층에서는 ‘이준석 신당’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적잖았다. 대학생 이철진(26)씨는 “우리 세대가 볼 때 국민의힘은 ‘꼰대’ 느낌이 너무 강하다”며 “진영 논리에 파묻히지 않고 아니다 싶으면 뭐든 비판하는 이준석 전 대표가 오히려 합리적으로 비치는 게 현실”이라고 짚었다. 회사원 이효원(32)씨도 “지금까진 국민의힘이 맘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이 지지하는 경향이 컸는데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다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며 “여야 정당도 언제까지 둘이 다 해먹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을 반영하듯 민주당도 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흔들리는 부산 민심을 잡기 위해 당력을 집중하고 나섰다. 지난 13일엔 이재명 대표와 지도부가 부산에 내려와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지역 현안 사업의 지속적인 추진을 약속했다. 이 대표도 “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각종 사업이 중단되지 않을까 많은 부산시민이 우려하는 것으로 안다”며 “특히 가덕도 신공항이 온전히 개항할 수 있도록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지세가 한순간에 늘어나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여전히 우세한 모습이었다.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몰려 있어 ‘부산의 강남’으로 불리는 해운대구 엘시티에서 만난 주민 박모(46)씨는 “민주당과 이 대표에 대한 이곳 주민들의 의구심은 100층 마천루만큼이나 여전히 높다”며 “이 대표는 못사는 사람을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잘사는 사람을 끌어내리는 파괴적 행동을 지향하는 것 같아 지지하기가 꺼려진다”고 말했다. 주민 김모(63)씨도 민주당이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밀어붙이는 데 대해 “조국 사태 때 당한 걸 똑같이 복수하려는 것 같다”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이렇듯 깡통시장부터 엘시티까지 세대와 장소에 따라 천차만별인 부산 민심이었지만 “그만 좀 싸워라”는 바람만큼은 똑같았다. 부산역으로 가는 택시에서 만난 기사 이모(53)씨는 “정당이 다른 만큼 아예 안 싸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소통이라도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서로 흠집 내기에만 몰두해 있고 국민 목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으니, 이래서야 더욱 팍팍해지는 민생에 누가 정치권에 기대를 걸 수 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부산=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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