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처음 보고 인생책 만나고…267만명에 ‘첫사랑’을 선물하다

유주현 2023. 12. 2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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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누리카드’ 10주년
김O은씨는 문화누리카드로 생애 첫 뮤지컬 ‘킹키부츠’를 감상했다.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1. 뮤지컬 마니아인 회사원 김○은씨는 훗날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꾸고 있다. 한부모가정이자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으로 받은 문화누리카드로 2018년 난생 처음 뮤지컬을 보고 부터다. 세상 즐거운 뮤지컬 ‘킹키부츠’를 보며 대성통곡을 했다는데, “(성소수자인) 주인공 롤라가 마치 나에게 함부로 포기하지 말고 현실을 바꾸어 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롤라가 노래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 것처럼, 글쓰기를 좋아하는 자신은 아픈 경험을 글로 써서 세상의 온도를 0.1도 높이겠다는 꿈이 생겼다.
문화누리카드로 한국화를 배우는 진O주씨의 작품.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 희귀병에 걸린 아이 치료실에 다니느라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살던 19년차 주부 진○주씨는 요즘 동네 아트센터에서 한국화를 배운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빠듯한 외벌이로 세 자녀를 키우느라 그림을 잊고 살다가, 지인의 소개로 문화누리카드를 발급받고 용기를 냈다. 수강료에 재료비까지 할인받아 부담없이 시작했고, ‘내가 없는 삶’이라 생각했던 인생에서 자기 이름이 새겨진 작품을 전시할 기회가 생겼다. 아주 오랜만에 설렘과 심장의 요동침이 찾아왔다.

내년부터 연간 13만원으로 확대

‘문화누리카드’ 이용자들의 실제 경험담이다. 문화누리카드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가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에게 1인당 연간 11만원의 바우처를 지급해 문화적 삶을 향유하게 돕는 사업으로,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본격 운영을 시작해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이용자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한 한O본양. 문화누리카드로 승마를 배운다.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3년 기준 267만 명의 대상자가 세종문화회관·국립현대미술관·예술의전당·국립극장 등 주요 문화예술기관은 물론 전국 영화관과 주요 서점, 에버랜드·롯데월드 등 인기 여가시설에서 혜택을 받고 있다. 악기점이나 태권도장 등 개인사업자의 가맹점도 점차 늘어나 현재 전국 3만여 가맹점이 운영 중이고, 내년부터는 혜택이 연간 13만원으로 확대되는 등 소외계층의 활발한 문화 향유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이용자 만족도 조사에서 56.5%가 카드 발급 후 새롭게 접한 문화·관광·체육 분야가 있다고 답했고, 카드 이용 후 삶의 질 향상도는 2019년 75.8점에서 2023년 78.6점으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이 사업이 처음부터 원활했던 건 아니다. 초기엔 대상자들이 이용에 소극적이었고, 정보 부족으로 ‘몰라서 못 받는’ 사각지대도 생겼다. 주민센터에 직접 방문해 자격을 확인하고, 카드 수령을 위해 재방문까지 해야 하는 불편도 있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매년 늘어나고 고령화 추세에 노년층 대상자도 날로 증가하니 사각지대 관리가 가장 큰 화두가 됐다.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되는 전화 ARS 발급, 노년층과 장애인 대상으로 담당자가 직접 방문해 발급해주는 ‘찾아가는 발급 서비스’까지 등장한 이유다.

자동재충전, 우수 사례로 꼽혀

2019년부터는 ‘권리구제서비스’가 시작됐다. 사회보장정보원과 협업해 대상자 정보를 전국의 주민센터 담당자들에게 제공하는데, 매년 약 70만명의 누락 대상자들을 추출해 적극적인 구제에 나서고 있다. 2021년 도입된 ‘자동재충전’ 제도는 문체부 적극행정 우수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자동재충전 시행으로 2021년 기준 전체 이용자의 71.7%인 127만 명이 해가 바뀌어도 별도의 확인 절차 없이 자동으로 재충전해 이용하게 됐다. 광주 서구에 사는 조○성씨는 “뇌출혈로 쓰러져 재활치료를 받다보니 주민센터 이동이 매우 힘든데, 자동재충전 덕분에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됐다. 큰 박수 쳐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올해 문화누리카드 수기 공모전 대상을 받은 권○진씨도 적극적인 권리구제서비스를 받은 케이스다. 가정 형편 탓에 통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했던 권씨는 대구시 행정복지센터 공무원으로부터 문화누리카드를 안내받은 후 인생이 달라졌다. 관계가 어렵던 가족으로부터 홀로서기를 하는 과정에서 처음 구입해 읽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00년 동안의 고독』이 “인생의 첫사랑”이 됐고, 이후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처음 뮤지컬도 보고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도 관람하면서 내면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권씨는 “한 여자 공무원이 카드 발급에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가족처럼 살뜰히 챙겨줬다”면서 “책 속의 다채로운 이야기와 세계관에 빠져들면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생겨 뮤지컬, 클래식 등 공연을 보기 위해 바깥 외출을 하게 됐고, 그러면서 세상과 접촉하며 견문이 확장되는 계기가 됐다. 문화누리카드를 통해 한발짝 세상과 가까워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연간 10여만원의 바우처로 단가가 높은 뮤지컬, 클래식 등 공연 티켓을 정가로 구입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미판매 좌석을 활용하는 ‘나눔티켓’이 등장한 이유다. 나눔티켓은 문화예술단체로부터 객석을 기부받아 문화누리카드 이용자에게 무료 또는 할인가로 공연과 전시를 접할 수 있게 지원하는 서비스로, 예술단체 입장에서는 공석으로 비워질 수 있는 좌석을 채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나눔티켓을 종종 이용한다는 박○○씨는 “팍팍한 형편에 공연 관람은 사치라고 생각했는데, 나눔티켓으로 연극 ‘라이어’ 관람 기회를 얻어 몰랐던 연극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고 했고, 주부 김○○씨는 “꿈을 뒤로 한 채 육아와 살림을 하면서 점점 작아지던 나에게 나눔티켓으로 관람한 뮤지컬 ‘6시 퇴근’은 꿈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마음을 주었다”고 말했다.

권○진씨가 수기 공모전 대상을 받은 글의 제목은 ‘큐피드를 만나다’이다. 문화누리카드로 만난 마르케스의 책에 그만큼 애틋한 감정과 여운이 남아 있다는 뜻일까.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신화를 새롭게 해석하고 싶어요. 큐피드의 화살을 맞으면 내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고 말이죠. 나에게 그런 큐피드가 되어준 것이 문화누리카드입니다.” 권씨의 말이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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