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서 비누까지 ‘숨겨진 이야기’ 끄집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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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회고전 연 사진작가 구본창
내년 3월 1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1, 2층에서 사진작가 구본창(70)의 대규모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가 열린다. 서울시립미술관이 2024년 사진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야심차게 준비한 전시로 1968년 제작한 ‘자화상’부터 최근작 ‘익명자’와 미발표작 ‘콘크리트 광화문’까지 5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더불어 소년 시절부터 남다른 미감으로 수집해 온 잡지 표지, LP 커버, 비누 조각 등 수집품 600여 점이 함께 전시됐다.
새로운 시선으로 연출사진 도화선
다양한 소재로 지금까지 구본창이 선보인 사진 시리즈의 개수는 50여 개. 그중 이번에 43개의 시리즈가 소개됐다. 이 엄청난 숫자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진짜 가치는 구본창이라는 한 사람이 시대의 파도를 넘으면서 어떤 경험을 통해 작품세계를 변화시켜 왔는지 그 기나긴 연대기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라는 점이다. 한 사람의 작가를 이렇게까지 되짚어 본 사례는 드물다. 그만큼 구본창의 작품세계는 한국 현대사진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985년 독일 유학 후 귀국한 구본창이 직접 기획해 8명의 해외 유학파 신진작가들을 모아 열었던 ‘사진 새시좌전’은 한국 사진의 새 지평을 열었던 도화선으로 평가받는다.
Q : ‘사진 새시좌전’은 한국 사진계가 스트레이트 사진이 아닌, 연출사진이라는 새로운 사진표현 방식을 시도하게 된 도화선이 됐다고요.
A : “나 또한 도시풍경 등의 스트레이트 사진을 찍었고, 항상 스트레이트 사진을 잘 찍으려고 노력해요. 그건 기본이니까. 스트레이트 사진이냐 연출사진이냐를 떠나서 당시 내가 추구했던 것은 일반적인 일상의 다큐멘터리, 풍경사진 말고 새로운 시선이었어요. 길거리에서 발견한 무언가를 그대로 찍는 게 아니라, 작가가 의도를 갖고 배경을 만들어 감정을 이입해 찍는 사진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A : “사진의 표면적인 이미지만으로 답답함과 분노를 표현할 길이 없어서 회화적인 요소들을 사진에 접목할 때였죠. 내 에너지와 감정을 어떡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인화지 위에 붓질을 하고, 스크래치를 내고, 태우고, 잘라 꿰매면서 사투를 벌였던 시기였죠.”
Q : 공자가 말한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을 실제로 경험한 거군요.
A : “그렇게 됐어요(웃음). 인생이 결국 태어나서 사라지고 없어지는 순환이구나, 사투를 벌일 만큼 처절하게 싸울 일이 아니구나. 강한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생존해야 한다는 욕심이 사라지면서 한 발자국 물러나 힘을 빼고 세상을 바라보게 됐죠.”
“관찰자로서 세상 바라보는 연습 계속”
A : “호기심이 많다고 할까요(웃음). 그런데 이질적으로 보이는 작품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다면 ‘숨겨진 이야기를 가진 것들’이라 할 수 있겠네요. 어떤 형태든 귀천을 떠나 상처 있고, 세월의 때가 묻어 있는 것들에 숨겨진 이야기를 내가 끄집어낼 수 있기를 바라죠. ‘시간의 그림’ 때부터 서서히 화면이 차분해지고 비어 가죠. ‘화이트 시리즈’에선 담쟁이덩굴 라인 몇 개만 보이고. 빈 상자와 빈 공간을 찍은 ‘인테리어’ 시리즈를 하면서 ‘백자’ 시리즈로 넘어갔는데, 어느 날 텅 빈 상자 구석에 쌓인 먼지와 옷핀 하나를 보면서, 비움과 채움 그리고 사라지는 것들과 시간의 흔적이 건네는 이야기들이 궁금해졌죠. 그렇게 내 모든 작품들은 ‘이야기’가 중요해요.”
Q : 전시 공간 마지막 ‘열린 방’에는 작은 사이즈의 스냅사진들이 걸렸습니다.
A : “독일 유학시절부터 현재까지 찍은 것들이 섞여 있어요. 카메라든, 휴대폰이든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계속 하는 거죠. 내가 드러나지 않고 관찰자 입장에 머물고 싶어서 ‘익명자’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중 무엇이 어느 순간 모티브가 돼서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될지 모르죠. 요즘 길거리에 버려진 매트리스 사진에 자꾸 눈이 가긴 해요. ‘홈리스의 홈’ 뭐 이런 걸 생각해봤는데 이야기가 잘 풀릴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전시 가장 마지막 사진은 해 지는 바닷가에서 포착한 검은 실루엣의 소년이다.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소년 구본창’의 항해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는 의미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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