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유웨이 “혈통 잇게 돼 기뻐” 젖먹이 쿵더청에 축하전문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00·끝〉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사회 기풍이 청 말보다 더 손상된 원인 찾기에 골몰했다. 혁명으로 인한 봉건제의 붕궤와 예교(禮敎)의 폐기가 이유라고 단정했다. 공자학설을 통해 국면만회와 질서안정을 모색했다. 최고통치자가 공자 존중과 복고(復古)를 주장하자 공교회(孔敎會), 공도회(孔道會), 세심사(洗心社) 등 존공(尊孔)단체가 성립과 동시에 교육부의 비준을 받았다. 위안은 베이징과 지방에 ‘만세의 사표’ 공자의 제사(祀孔典禮)를 지내라고 명령했다. “지방은 성장이 직접 치제(致祭)해라. 베이징은 대총통이 직접 제를 올린다.” 특별교육지침도 내렸다. “전통을 존중하고 파괴를 금하는 것이 애국이다. 전국의 중학교는 전통을 존중하는 영국을 본받아라. 영어 교육에 힘쓰고 학생들에게 맹자(孟子)를 하루도 빠짐없이 낭송토록 해라. 고등학교는 논어(論語) 교육 철저히 해서 사악한 언사가 폭력임을 학생들이 자각 하도록 해라.” 위안스카이의 복고는 개국황제들이 하늘에 고하던 제천의식으로 극에 달했다.
타오원푸 “내 아들을 네가 봐서 뭐 하나”
신문화운동은 청년들의 각성제였다. 1919년 5월 4일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그칠 줄 모르는 신문화운동과 ‘공가점 타도’ 외치는 학생시위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던 연성공(衍聖公) 쿵링이(孔令貽·공령이)는 불안했다. 1919년 11월, 딸만 둘 낳은 측실 왕바오추이(王寶翠·왕보취)가 세 번째 임신 중 베이징의 연성공 관저에서 발병 2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앞두고 대필시킨 유서를 대총통 쉬스창(徐世昌·서세창)에게 보냈다. “엎드려 울며 유서를 구술합니다. 우둔하고 어리석은 저는 청 왕조 광서(光緖) 2년에 연성공 작위를 세습했습니다. 민국 성립 후에도 위안 대총통은 저를 연성공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지난 8년간 역대 총통들께 받은 보살핌에 보답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장인의 별세를 조문하러 베이징에 왔습니다. 갑자기 등창이 발생해 치료를 받았으나 일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50이 되도록 아들이 없어 노심초사 하던 중 처첩 왕씨가 임신을 하여 현재 5개월 가량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전례대로 공부(孔府)와 공묘(孔廟)의 일이 순조롭게 되도록 하여 주시면 불초소생은 저승에서 감사할 것이며 일족 모두 은혜에 감격할 것입니다.”
쿵더청, 공부 비극 알고 대륙땅 안 밟아
정실 타오원푸는 지독한 여자였다. 쿵더청이 태어나자마자 제 방으로 안고 갔다. 3일 후 탕약 들고 산모 왕바오추이의 방으로 갔다. “잠잘 때 부들부들 떠는 것 보니 내 맘이 편치 않다. 이 약을 먹어라.” 옆에 있던 공씨 일족의 노부인이 훗날 쿵더청의 작은 누나 쿵더우(孔德懋·공덕무)에게 구술을 남겼다. “왕씨는 침대 위에 꿇어앉아 아픈 곳이 없으니 약 먹을 필요가 없다고 애원했다. 타오씨는 말이 없었다. 그냥 마시라고 압박했다. 왕씨가 살아봤자 좋은 날도 없을 터이니 약 먹는 것은 두렵지 않다며 아들만 한번 보게 해 달라고 애걸했다. 타오씨는 내 아들을 네가 봐서 뭐 하느냐며 고개를 돌렸다.” 타오원푸는 한밤중에 왕바오추이의 관을 하인들 시켜 공림(孔林) 구석에 대충 묻어버렸다. 작은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타오씨는 쿵더청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국·공전쟁 말기 장제스 부자와 함께 대만으로 나온 쿵더청은 공부의 비극을 알고 있었다. 다시는 대륙땅을 밟지 않았다.
■ 그동안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 중앙SUNDAY의 최장기 인기연재물인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가 800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2007년 3월 18일 중앙SUNDAY 창간호부터 시작해 16년간 중국 정치인, 학자, 예술가, 문인 등 인물 스토리를 중심으로 파란과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를 개성 있는 문체로 펼쳐 왔습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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