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유웨이 “혈통 잇게 돼 기뻐” 젖먹이 쿵더청에 축하전문

2023. 12. 2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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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00·끝〉
영화 ‘공자’에서 공자 역을 열연한 저우룬파(周潤發)에게 공부 생활을 설명하는 쿵더청의 누나 쿵더우. [사진 김명호]
청나라 말기 중국의 혁명파들은 무능했다. 열혈청년들 사지(死地)로 떠미는 재능만 탁월했지 통치능력은 없었다. 군을 장악한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공화제 실시를 조건으로 혁명의 열매를 갖다 바쳤다.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사회 기풍이 청 말보다 더 손상된 원인 찾기에 골몰했다. 혁명으로 인한 봉건제의 붕궤와 예교(禮敎)의 폐기가 이유라고 단정했다. 공자학설을 통해 국면만회와 질서안정을 모색했다. 최고통치자가 공자 존중과 복고(復古)를 주장하자 공교회(孔敎會), 공도회(孔道會), 세심사(洗心社) 등 존공(尊孔)단체가 성립과 동시에 교육부의 비준을 받았다. 위안은 베이징과 지방에 ‘만세의 사표’ 공자의 제사(祀孔典禮)를 지내라고 명령했다. “지방은 성장이 직접 치제(致祭)해라. 베이징은 대총통이 직접 제를 올린다.” 특별교육지침도 내렸다. “전통을 존중하고 파괴를 금하는 것이 애국이다. 전국의 중학교는 전통을 존중하는 영국을 본받아라. 영어 교육에 힘쓰고 학생들에게 맹자(孟子)를 하루도 빠짐없이 낭송토록 해라. 고등학교는 논어(論語) 교육 철저히 해서 사악한 언사가 폭력임을 학생들이 자각 하도록 해라.” 위안스카이의 복고는 개국황제들이 하늘에 고하던 제천의식으로 극에 달했다.

타오원푸 “내 아들을 네가 봐서 뭐 하나”

1936년 12월 공부에서 열린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의 결혼식. 참석하기로 했던 장제스는 시안(西安)에서 장쉐량(張學良)에게 감금당하는 바람에 불참했다. [사진 김명호]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해외에서 군사교육 받은 젊은 군사가들이 위안스카이 타도 깃발을 날렸다. 일본과 미국 유학생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복고에 대한 반발로 신문화운동을 일으켰다. 과학과 민주와 알기 쉬운 백화문(白話文) 사용을 제창하고 독재타도와 미신타파를 노래했다. 사회주의 전파의 토대도 저절로 마련됐다. 수천 년간 내려온 전통은 모두 파괴 대상이었다. 2000여년간 의식을 강요당한 공자사상이 도마 위에 올랐다. ‘공자를 구도덕의 상징으로 전락시킨 공가점(孔家店)을 타도하고 공부자(孔夫子)를 구출하자’는 구호가 전국의 대도시를 수놓았다.

신문화운동은 청년들의 각성제였다. 1919년 5월 4일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그칠 줄 모르는 신문화운동과 ‘공가점 타도’ 외치는 학생시위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던 연성공(衍聖公) 쿵링이(孔令貽·공령이)는 불안했다. 1919년 11월, 딸만 둘 낳은 측실 왕바오추이(王寶翠·왕보취)가 세 번째 임신 중 베이징의 연성공 관저에서 발병 2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앞두고 대필시킨 유서를 대총통 쉬스창(徐世昌·서세창)에게 보냈다. “엎드려 울며 유서를 구술합니다. 우둔하고 어리석은 저는 청 왕조 광서(光緖) 2년에 연성공 작위를 세습했습니다. 민국 성립 후에도 위안 대총통은 저를 연성공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지난 8년간 역대 총통들께 받은 보살핌에 보답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장인의 별세를 조문하러 베이징에 왔습니다. 갑자기 등창이 발생해 치료를 받았으나 일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50이 되도록 아들이 없어 노심초사 하던 중 처첩 왕씨가 임신을 하여 현재 5개월 가량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전례대로 공부(孔府)와 공묘(孔廟)의 일이 순조롭게 되도록 하여 주시면 불초소생은 저승에서 감사할 것이며 일족 모두 은혜에 감격할 것입니다.”

공부시절의 쿵더청과 두 명의 누나. 오른쪽은 남매의 영어교사.
총통 쉬스창이 내무부를 통해 산둥(山東)성 성장에게 지시했다. “연성공 쿵링이의 측실 왕씨의 임신 여부를 확인해서 보고해라.” 중국 의사와 독일 의사, 저명한 산파들이 왕씨의 임신이 5개월이 지났다는 확인서를 작성했다. 다음 문제는 유복자의 성별이었다. 딸이 태어나면 정실 타오원푸(陶文譜·도문보)와 왕씨 소생 두 딸은 공부를 떠나고 동등한 자격 갖춘 사람이 연성공을 계승하는 것이 상례였다. 타오씨는 온종일 향불 피워 놓고 절하며 매일 두들겨 패기만 하던 왕씨가 아들 낳기만을 빌었다. 중국은 교묘한 수법으로 영아를 바꿔치기하는 흉악한 전통이 있었다. 왕씨의 해산이 임박하자 정부는 군대를 파견했다. 산방을 포위하고 도처에 초소를 설치했다. 장군 한 명이 공부에 진을 치고 산둥성 성장과 안자(顔子), 증자(曾子), 맹자의 종손과 공부의 12촌 내 노부인들이 몰려와 눈에 불을 켰다. 난산 끝에 아들이 태어나자 공부의 하인 700여명이 횃불 들고 거리로 나갔다. 징을 치며 성인 후예의 탄생을 알렸다. 정부도 축포 13발로 유아 쿵더청(孔德成·공덕성)에게 경의를 표했다.

쿵더청, 공부 비극 알고 대륙땅 안 밟아

1935년 7월 8일 쿵더청은 민국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연성공 대신 공자 제사만 모시는 세습특임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特奉祀官)에 취임했다.
공부에 축하전문이 줄을 이었다. 대유(大儒) 캉유웨이(康有爲·강유위)가 젖먹이에게 보낸 전문을 소개한다. “소인은 아버님의 서거에 슬픔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귀한 아들이 태어나 성인의 계보와 귀한 혈통 잇게 되었다는 소식에 극심한 슬픔 뒤에 이어지는 기쁜 감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즐겁고 건강한 유년기 보내시며 시와 의례에 많은 공부 쌓으시어 조상들의 영광을 빛내게 하소서. 소인이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공부를 찾아온 캉유웨이는 강보에 쌓인 연성공 쿵링이의 유복자 쿵더청을 품에 안고 통곡과 웃음을 반복했다. 쿵더청은 생후 100일이 되는 날 31대 연성공을 습작했다.

정실 타오원푸는 지독한 여자였다. 쿵더청이 태어나자마자 제 방으로 안고 갔다. 3일 후 탕약 들고 산모 왕바오추이의 방으로 갔다. “잠잘 때 부들부들 떠는 것 보니 내 맘이 편치 않다. 이 약을 먹어라.” 옆에 있던 공씨 일족의 노부인이 훗날 쿵더청의 작은 누나 쿵더우(孔德懋·공덕무)에게 구술을 남겼다. “왕씨는 침대 위에 꿇어앉아 아픈 곳이 없으니 약 먹을 필요가 없다고 애원했다. 타오씨는 말이 없었다. 그냥 마시라고 압박했다. 왕씨가 살아봤자 좋은 날도 없을 터이니 약 먹는 것은 두렵지 않다며 아들만 한번 보게 해 달라고 애걸했다. 타오씨는 내 아들을 네가 봐서 뭐 하느냐며 고개를 돌렸다.” 타오원푸는 한밤중에 왕바오추이의 관을 하인들 시켜 공림(孔林) 구석에 대충 묻어버렸다. 작은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타오씨는 쿵더청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국·공전쟁 말기 장제스 부자와 함께 대만으로 나온 쿵더청은 공부의 비극을 알고 있었다. 다시는 대륙땅을 밟지 않았다.

■ 그동안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 중앙SUNDAY의 최장기 인기연재물인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가 800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2007년 3월 18일 중앙SUNDAY 창간호부터 시작해 16년간 중국 정치인, 학자, 예술가, 문인 등 인물 스토리를 중심으로 파란과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를 개성 있는 문체로 펼쳐 왔습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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