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때 ‘만다라트’ 완성해 실천…‘만찢남’ 다 계획이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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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류’ 오타니 매력의 정체
한 청년이 있다. 키 크고 잘생긴 부잣집 도련님 같은 외모에 친절한 미소와 고운 인성, 그리고 탁월한 야구 실력까지 뭐 하나 빠진 구석이 없는 청년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이런 청년이 존재한다면 어느 여식(女息) 가진 부모가 설레지 않을까.
오타니 쇼헤이 이야기이다.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그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어느 날은 타자가 꼼짝 못하는 빠른 공으로, 또 어느 날은 펜스를 훌쩍 넘기는 홈런으로 스포츠 뉴스에 얼굴을 내비치던 오타니는 어느 사이엔가 아무런 저항감 없이 우리의 경계심을 허물고 들어와 버렸다.
몸값 9240억원 최고, LA 다저스로 이적
신드롬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오타니는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매력적인 MLB 야구선수임에 틀림없다. 일찍이 오타니만큼 호의적이었던 일본인이 있었던가. 확실히 오타니에게 향하는 대한민국의 감정은 스즈키 이치로에게 품었던 그것과 다르다. 이치로가 사무라이라는 어색한 페르소나에 갇혀 있어 밉상이었다면 오타니는 성실하고 반듯한 청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런 민족주의적인 프리즘과는 별개로 오타니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남다른 그 무엇이 있다. 그 매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오타니에게 투영된 우리의 인식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오타니에 대한 시선을 통해 우리 사회를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열광하지 않으면서 흐뭇하게 이웃나라 청년을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 거기에는 무엇이 투영되어 있을까.
요샛말로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인물이 현실 속에 등장했을 때 ‘만찢남’이라고 부른다.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의 줄임말로 이해할 수 있는데, 오타니는 누가 봐도 이 단어를 위해 존재한다. 외모, 성격, 심성, 노력, 성실, 자기관리, 실력 등 야구선수로서뿐 아니라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보여주는 완벽함은 ‘만찢남’의 뜻 그대로이다.
그중 가장 경이로운 만찢남의 요소는 투수와 타자를 겸하는 ‘이도류(二刀類)’일 것이다. 철저히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 투수와 타자의 겸업 자체가 무모한 도전인데 심지어 양쪽에서 압도적인 기록을 만들어 낸 오타니의 능력은 역설적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이다. 2023년 아메리칸 리그 MVP를 만장일치로 수상했다는 뉴스에서는 허술한 만화의 스토리 구성이 느껴질 정도이다. 출루율, 장타율, OPS, 홈런 1위로 4개의 타격 타이틀을 차지하는 대목은 만화로 설정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허구적이다. 겨우 스토리의 개연성을 부여한 점이 팔꿈치 부상과 그로 인해 투수로서 10승에 머문 성적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한 해에 투수로서 10승과 40홈런을 기록한 신체적 탁월성은 오타니의 심성과 자기절제의 완벽한 캐릭터를 위한 포석에 지나지 않는다. ‘만다라트’(목표와 구체적인 세부 항목을 담은 정사각형 도형)는 그의 완벽성이 천부의 능력이 아닌,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계획과 부단한 실천적 노력의 결과라는 뻔한 도덕 교과서적 가르침으로 치환되어 현실성을 느낄 수 없다. “쓰레기를 줍는 일은 먼저 지나간 사람이 떨어트린 행운을 줍는 일이다”라는 그의 말은 윤리적인 너무나도 윤리적인 어록이어서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이런 단편적인 이야기의 요소는 오타니의 순둥이 같은 외모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비현실적인 리얼리티를 더욱 강화한다.
“쓰레기 줍는 건 행운을 줍는 일” 어록도
오타니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애정은 손흥민과 그 결을 달리한다. 손흥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서 민족주의의 프리즘이 끼워져 있다면 오타니에게는 미학적 찬사가 숨어 있다. 다시 말해 손흥민에게는 살짝 국뽕의 냄새가 묻어난다면 오타니에게는 아름다운 청년을 바라보는 미학의 즐거움이 있다.
오타니가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어두운 우리나라 청년의 초상이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이국 청년의 모습에 투영된 까닭이다. 오타니에 대한 시선은 역전 홈런을 기대할 수 없는 정해진 결과에 패배하고 싶지 않아 비현실적인 ‘만찢남’에 잠시 자신을 포개보는 일이라 해도 좋다. 오타니가 팬데믹의 우울한 시간에 우리를 찾아왔다는 사실은 이런 심증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탁월한 개인이 공동체를 이끄는 시대는 지났다. 이끌 영웅도 없고 이끌릴 대중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벤져스와 마블 시리즈에 빠져든다. 이 시대의 영웅은 역사의 구원자가 아니라 일상의 고단함을 위무할 ‘만찢남’으로 존재한다.
내년 3월 그 ‘만찢남’이 우리나라에 온단다. 그때까지 우리 청년들이 힘냈으면 좋겠다. 타석에 들어선 오타니처럼 주목받는 청춘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에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함을 3월 고척돔의 타석에서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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