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주관한 영어 시험, 부모들이 관리 통해 문제 빼냈다
━
[근현대사 특강] 미국과 수교 초기 풍경
1882년 4월 미국과의 수교 후 6월 임오군란의 반발로 국정이 일시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고종 정부는 11월에 신식 외교 통상 사무를 전담하는 통리아문을 설치하고 독일인 묄렌도르프, 미국인 데니 등을 초빙해 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 등과도 차례로 국교를 수립했다. 1883년 4월 초대 미국 공사 푸트가 아서 대통령의 비준서를 들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답례로 6월에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고종의 비준서를 들고 미국으로 갔다.
시험 채점은 ‘통·약·차·벌’ 4등급 구분
11. 그 나라가 부강하다면 군사제도는 어떠하던가.
15. 대통령의 임기는 얼마나 되나.
16. 조정의 관직도 다 4년마다 교체되는가.
18. 미국의 관제는 유럽과 다른가.
19. 부통령은 매양 대통령으로 승진하는가.
20. 민주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는 몇이나 되며, 유럽에도 민주국가가 있는가.
26. 대통령 궁실 제도는 어떠하던가.
30. 기계가 정교하기로는 과연 천하제일이라 말할 수 있던가.
36. 농사 업무는 어떠한가.
42.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우리나라가 영국, 독일과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소식을 들었는가.
50. 워싱턴은 미국의 서울인데, 응당 주둔 육군의 수가 적지 않겠다.
52. (민병은) 낮에는 직무에 충실히 근무하고 밤이면 군사훈련을 익히고 있다니, 이것이 바로 부강하게 된 까닭이 아닌가. 남미와 북미의 나뉨은 어떠한가.
신문명 수용을 위해서는 영어와 서양 문화를 아는 인재 육성이 필요했다. 1884년 정부는 푸트 공사를 통해 미국 정부에 교사 3인을 요청했다. 국무성 교육국장 존 이튼이 힘써 윌리엄 길모어, 달젤 벙커, 호머 헐버트 등 3인이 1886년 7월 초 이 땅을 밟았다. 같은 해 이들이 가르칠 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했다. 『육영공원등록』(서울대 규장각 소장)에 따르면 과거 급제 7품 이하 관료 중 젊고 재능이 있는 자 10명을 뽑아 좌원, 현직 당상관의 아들 사위 아우 조카 친척 가운데 능력이 있는 자 20명을 뽑아 우원에 각각 속하게 했다. 3년 과정으로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고, 시험은 매달·연말 단위로 치르고 3년째 졸업시험은 대고(大考)라고 했다. 영어 외에 세계사, 지리, 수학, 의학, 농학, 생물학, 지리, 천문, 기기 등을 배웠다. 교사들은 이 학교를 Royal College라고 불렀다.
교사 호머 헐버트는 처음부터 조선말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하고 조선말 배우기부터 시작해 2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1999년 ‘헐버트 기념사업회’를 세운 김동진은 헐버트에 관한 저서 4권을 출간하여 그의 활동과 업적 연구의 길을 열었다. 그 가운데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는 헐버트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와 미국 신문에 보낸 기고문 등에 근거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밝혔다. 이 책에 소개된 사실 두어 개만 보자.
황태자 순종, 외교관 가족에 영어 과외
조선 도착 두 달 만인 1886년 9월 23일에 열린 육영공원 입학식에서 서투르지만 조선말을 구사하고 5개월 만인 1886년 12월에 조선말을 섞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년째는 조선말로 상당한 수준의 강의가 가능했다.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조선말 선생은 지금도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두뇌가 명석하다고 했다. 내가 평생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그 사람은 내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라고 밝혔다. 1888년부터는 신식 의술을 배우는 제중원에서도 가르쳤다.
1889년 8월 19일 자 『뉴욕 트리뷴』지에 기고한 ‘임금이 주관한 시험’도 흥미롭다. 임금 (고종)은 학기가 끝날 때 자신이 직접 시험을 주관해 보겠다고 자청했다, 헐버트는 이를 임금 자신의 발상으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기억할만한 큰 사건이라고 했다. 시험 장면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임금 왼편에 세자가 앉고 7, 8명 조정 중신이 방 양쪽 편에 나누어 앉았다. 밖에서 기다리던 학생들은 호명하면 한 명씩 안으로 들어가 임금 앞에 무릎 꿇고 질문을 받았다. 교사들은 2000여 개의 단어를 섞어 문제와 답안을 만들어 임금에게 미리 건네 그중에서 골라 묻게 하였다. 한글로 영어 발음을 적고 그 밑에 한문으로 뜻을 달았다. 채점은 통(通 A)-약(略 B)-차(次=버금 C)-벌(罰 D) 4등급으로 구분했다.
이런 일도 소개했다. 한 학생이 질문을 받고 답하기를 “I do not know” 대신에 “I don’t know”라고 답하며 실력을 과시했다. 임금이 틀렸다고 지적하자 헐버트가 줄임말이라고 설명했다. 임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번은 학생들이 답을 생각보다 잘해 알아보니 왕이 주관하는 시험인지라 극성스러운 부모들이 궁궐 관리들을 통해 문제를 사전에 알아냈다는 것이다. 요즈음 얘기 같다.
헐버트의 임금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호의적이다. 임금은 친절하고 자상해 잘 웃는 편으로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고 적었다. 임금은 조선말도 잘하고 열정적인 헐버트를 특별히 좋아했다. 훗날 두 사람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맞서 싸우는 황제와 밀사라는 운명적 관계가 된다. 호머 헐버트는 1888년 말 무렵 학생 수 증원을 요청했다. 임금은 1개월 이내 40명을 늘리라고 하여 1889년 현재 112명이 되었다.
1898년 10월 황태자(순종)도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외부대신이 영국인 외교관 부인 릴리 졸리와 체결한 ‘황태자 영어교사 고용 계약서’가 서울대 규장각에 남아 있다. 2년 단위로 두 번 체결한 계약서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미국을 모델로 한 것들이 태반이다. 1896년 9월부터 시작한 ‘서울 도시개조사업’이 대표적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갈 새 왕궁 경운궁(현 덕수궁)을 워싱턴의 대통령궁(백악관)을 본 따 도심에 지어 방사상 도로체계의 중심으로 삼았다. 동쪽 대안문 (현 대한문) 앞에 광장(현 서울광장)이 생기고 종로와 남대문로에 전차가 달리는 신문명 도시가 됐다. 제중원에서 영어를 배워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을 수행해 워싱턴 시정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채연이 한성부윤(서울시장)으로 이룬 업적이었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