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그 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영화 <서울의 봄>의 기세가 심상찮다. 원래 한국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현대사나 정치 관련 콘텐츠가 인기를 얻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의 흥행을 기록한 작품은 드물다.
<서울의 봄>은 훨씬 더 앞당겨졌을 수 있었던 서울의 봄을 십수 년이나 늦춘 1979년 12월의 그 사건을 다룬 영화다. 40년도 더 된 이야기에서 21세기의 관객들은 무엇을 보고자 하는 것일까.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900만명을 넘은 관객들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사건이 일어난 과정의 허술함이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어설픈(?) 시도를 몇몇 사람들의 오판으로 그르친 아쉬움은 그 뒤로 이어진 해당 일당들의 뻔뻔함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과 겹쳐 분노로 화한다.
그러나 그 사건의 본질은 악의 무리와 몇몇 빌런들의 오판이 아니다. 눈에 띄는 악역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40여년 전의 그 사건은 누구에 의해서든 언제 어디서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건은 장소와 형태를 바꿔 언제 어디서든 반복될지 모른다.
심리학은 악인들의 특성을 찾아 그들을 선한 사람들로부터 분리하려는 대신에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를 밝히려 노력해 왔다. 이러한 목적으로 수행된 연구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실험과 필립 짐바르도의 감옥실험이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선생님 역할을 맡은 실험 참가자들은 실험을 진행하는 권위자의 명령에 복종하여 학생들에게 450V에 이르는 전기쇼크를 가했으며, 짐바르도의 실험에서 죄수와 간수 역할을 맡은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몰입한 나머지 평소의 자신들이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들을 저질렀다.
그들은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회적 역할과 지위, 상황의 압력이 그들을 ‘악한’ 일을 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오해는 하지 말자. 그들의 악한 행동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상황이 어쨌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회심리학의 고전적 실험들이 밝혔듯이 인간은 권위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특정 역할을 수행하면서 개인적 신념이나 가치를 잃어버리며 집단에 휩쓸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다. 몰개성화(deindividuation)라는 현상이다. 그러나 1979년 12월의 그 사건을 복종과 몰개성화로만 이해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
그 사건의 본질은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라고 맡겨놓은 무력을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이나 역할 수행 중에 자신의 개성을 상실하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상관의 명령에 따라야만 했던 병사들의 입장은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사건 자체는 지휘관급의 인물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들은 군대 내에 사조직을 만들었으며 국가로부터 받은 임무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였다.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는 후대인의 눈으로 보자니 아쉬운 부분들이 눈에 띌 뿐, 애초에 주요 부대의 지휘관직을 독점하고 통신시스템을 손아귀에 쥔 일당의 조직적 행위를 저지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적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이 사적 관계에 몰입해 자신들의 의무를 저버리고 국가 권력을 찬탈한 것이 그 사건의 핵심이다. 소위 패거리 문화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원리는 동양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예전부터 경계해 온 구성원들의 일탈이다. 특히 한국과 같은 관계주의 문화에서 이러한 사적 관계화는 공사 구분을 어렵게 하고 부정부패와 같은 부작용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의 사유화와 같은 최악의 결과에 이를 수 있다.
심리학 이론들이 정립된 서구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사회의 기본이 되는 개개인들이 저마다의 개인성(individuality)을 잃고 권위에 복종하고 집단에 휩쓸리게 되는 상황을 가장 경계해 온 데 반해, 집단에 속한 개인이 저마다의 역할에 충실할 때 사회가 유지된다고 가정하는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방기하는 사적 관계화를 경계해 왔다.
기본적으로 ‘형님, 동생’이라는 친족호칭으로 혈연에 못지않은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한국인들로서는 그 관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무엇을 위해 유지되는지, 그것이 내가 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역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사적 관계화의 영향은 선악을 가리지 않는다. 패거리는 어디에나 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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