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서경식 선생님과 시의 힘
‘시의 힘’은 언어로 세상 그리는 일
“시인은 절대 침묵해선 안되는 이”
동인지 중단에 유언처럼 다가와
며칠 전 서경식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재일조선인이었던 그는 평생 디아스포라 문제는 물론이고 식민주의와 전쟁, 동아시아의 평화, 원전 문제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온 이 시대의 살아있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탁월한 비평가로서 문학은 물론 미술, 음악 등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준 책들을 무수히 남겼다. 가족사를 비롯한 자전적 기록이나 인문 기행을 통해 역사와 문화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식견을 들려준 에세이스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서경식 선생님을 그 어떤 면모보다 ‘시인’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그가 말한 ‘시의 힘’이란 무엇일까. ‘시의 힘’이란 ‘시적 상상력’과 동의어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고 언어로 그려내는 일을 말한다. 저자는 루쉰이 말한 ‘길’의 비유를 빌려 시의 존재론을 설명하기도 한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라는 말처럼, 희망 없이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시인이라는 것이다. 루쉰에 대한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빌자면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루쉰의 문학이 나카노 시게하루와 서경식을 사로잡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처럼 ‘시의 힘’은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움직이게 하고, 함께 걸어가게 하는 데서 나온다. 물론 시인으로 살아가면서 ‘시의 힘’을 확인할 때보다는 시가 세상을 아무것도 바꿀 수도 없는데 왜 계속 시를 써야 하는 것일까 막막하게 질문할 때가 훨씬 많다. 그때마다 서경식 선생님의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 효율적인지 아닌지, 유효한지 어떤지 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고통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재촉한다.
다섯 명의 한국 시인이 모여 일본과 중국의 시인들과 함께 아시아 국제시동인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언어의 경계를 넘어 서로의 세계를 읽어내며 ‘몬순’이라는 동인지를 한·중·일에서 동시 출간했다. 동아시아의 외교적 갈등 관계를 시의 우정으로 극복하고 평화의 길을 찾아보자는 뜻에서 어렵게 시작한 일이었다. 시인들의 연대와 우정에서 희망의 가느다란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몬순’은 결국 현실적 어려움으로 2호로 끝이 났다. 서경식 선생님의 부음을 들으니, 걷다가 포기한 그 길이 문득 떠오른다.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그분의 말씀이 내게는 어떤 유언처럼 느껴진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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