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크리스마스 이야기

2023. 12. 2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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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케이크 굽는 사촌
누구에게나 그 추억 있지 않을까

트루먼 카포티, ‘크리스마스의 추억’(‘차가운 벽’에 수록, 박현주 옮김, 시공사)

무리하게 일하지 않고 감당할 수 없는 일정들은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사는데 12월에는 지키지 못했다. 원고를 넘기고 올해의 마지막 일정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 보니 택배가 와 있었다. 지인이 보내준 묵직한 슈톨렌 한 덩어리. 눈처럼 흰 슈가 파우더가 뿌려진 슈톨렌을 보자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날 저녁에 슈톨렌을 얇게 몇 조각 썰어서 어머니와 와인 한 잔을 마시며 미리 크리스마스 기분을 냈다.
조경란 소설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트루먼 카포티는 몇 편의 자전적 단편들을 발표했는데 그중 두 편이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일곱 살배기 버디는 부모가 맡긴 친척 집에서 사는데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는 육십 세가 넘은 여자 사촌과 가깝게 지낸다. 사촌은 영화를 본 적도 식당에 가본 적도 없고 성경 말고는 다른 책을 읽어본 적도 없지만 다른 사람이 나쁘게 되기를 바란 적도 거짓말을 한 적도 굶주린 개를 못 본 척한 적도 없었다. 그런 사촌은 자신을 “나이 들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버디에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고 마음이 맞는 사람이다. 퀴니라는 개 한 마리도 있다.

사촌은 매년 겨울, 새들이 따뜻한 지방으로 날아가고 법원의 종이 차갑고 맑게 울리는 아침이면 “과일 케이크를 굽기에 좋은 날씨네!”라고 말한다. 바로 그날부터 두 사람은 무려 서른 개의 케이크를 굽는 일을 시작한다. 숲에서 떨어진 피칸 열매를 한가득 싣고 오고 다음 날엔 없는 돈을 털어서 밀가루, 계피, 건포도, 호두, 버터, 달걀 같은 재료들을 사 온다. 사촌과 버디의 크리스마스 즐거움은 그렇게 과일 케이크를 구워서 친구들과 이웃들, 만나본 적은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들, 낯선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이다. 재료 중에 가장 비싼 위스키를 구하자 이제 준비는 끝났다.

두 사람은 낡은 집의 부엌에서 장작을 태우며 케이크 반죽을 시작한다. 달걀 거품기를 돌리고 버터와 설탕을 넣은 그릇을 휘젓는다. 달콤한 바닐라 향기와 톡 쏘는 생강 냄새가 부엌에 퍼진다. 나흘 동안 그들은 일 년 동안 어렵게 모은 돈으로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서른한 개의 케이크를 굽고 다시 빈털터리가 된다. 서른 개에서 한 개 더 늘어난 이유는 위스키값을 받지 않은 카페 주인에게 주기 위해서이다. 버디는 언제까지나 이 친척과 퀴니와 지금처럼 소박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버디는 집을 떠나게 되고 사촌은 그 후 몇 해 동안 혼자서 과일 케이크 굽는 일을 이어갔으나 자리에서 더는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12월의 어느 맑은 아침, 버디는 군사 학교 교정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맘때면 축제를 벌이듯 사촌과 케이크를 굽던 추억을 떠올린다.

누구에게나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있지 않을까. 슈톨렌을 조금씩 떼어먹으며 맞은편에 앉은 어머니 얼굴을 본다. 내가 어렸을 적에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눈을 뜨면 나와 자매들 머리맡에 맛동산, 오징어땅콩 같은 과자 두 봉지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가난한 부모가 세 딸에게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 이맘때면 춥고 추웠던 겨울 아침, 자매들과 붉은색 목련이 그려진 무거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이좋게 과자를 나눠 먹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후 나는 크리스마스에는 혼자 작업실에서 온종일을 보내는 사람이 되었는데 슈톨렌과 와인 한 병이면 충분히 행복한 거라고 느낀다.

소설집 ‘차가운 벽’에 실린 빛나는 단편 중에서 ‘오 헨리 단편상’을 수상한 단편들은 ‘미리엄’, ‘마지막 문을 닫아라’, ‘꽃들의 집’이며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고 이토록 뛰어난 소설은 쓸 수 없을 거라고 말했던 단편은 ‘마지막 문을 닫아라’, ‘머리 없는 매’이고, 이따금 내가 아껴 읽는 단편은 ‘밤의 나무’, ‘미리엄’인데,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지금과 잘 어울리는 단편은 ‘크리스마스의 추억’과 그 후속 단편에 가까운 ‘어떤 크리스마스’라고 생각한다. 혹은 트루먼 카포티가 쓴 가장 서정적이며 따뜻한 단편소설이.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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